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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퇴직하고 영국여행을 다녀왔다. 오래된 산업도시의 ‘현재’가 궁금했다.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도시에서 마르크스가 언급했던 영국의 ‘상업 자본주의’가 어떻게 ‘산업 자본주의’의 중심지로 진화했는지 궁금했다. 그 지역에서는 이제 ‘산업’은 찾을 수 없었다. 한때 조선산업을 제패했던 글래스고의 ‘드라이 도크’에선 망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텅 빈 지 이미 수십년이라 했다. 맨체스터의 방직공업부터 중공업 부지에는 박물관과 미디어 단지가 들어섰다. 리버풀은 비틀스 관광상품으로 도배된 도시였다. 뉴캐슬 타인강에서는 ‘조선소’가 있었다는 푯말 하나를 찾았다. 영광을 누렸다던 산업도시들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등장했던 노인 연금생활자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 도시들은 반세기 동안 각각 100만 인구에서 절반이 줄었다. 리버풀과 맨체스터의 유별난 축구사랑 뒤에는 별 희망이 없는 북부 잉글랜드의 우울함이 있었다.

산업도시들은 재탄생하는 중이라 했다. 맨체스터는 엔지니어링과 첨단 산업을 육성하는 대학도시로, 리버풀은 문화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런던의 금융업은 뉴욕에 패권을 넘겼지만, 정보·기술(IT) 산업이 유럽의 중심이 되고 있다 했다.

마음이 답답했다. 한국의 남동임해공업지역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40년 전 수출보국을 목표로 세운 포항, 울산, 창원, 거제, 여수의 거대한 산업벨트. 조선, 철강, 자동차 산업으로 먹고살았던 도시들은 지속가능할까? 세계 10위 안에 들던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STX 고성조선소가 문을 닫거나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의 수요급감 때문이다. ‘희망버스’만으로 고용을 살리기엔 구조적 변화가 크다. 자동차도 기계장치 산업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기업은 원가, 생산, 고용은 몰라도 수요는 관리할 수 없다. 대규모 고용으로 부를 창출했던 산업도시의 미래는 밝지 않다.

영국은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제조업을 버렸다. 대처부터 블레어까지 영국의 정치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경쟁력이 떨어진 굴뚝산업 대신 세련된 금융업과 지식산업의 나라를 만들려 했다. 산업구조조정으로 인해 장인으로 불렸던 노동자들은 불안정노동으로 내몰리거나 연금생활자가 됐다. 연대와 우애로 뭉친 노동계급의 건강한 모습은 철 지난 유행가처럼 잊혀졌다. 노동자들의 다음 세대는 일할 의욕 없이 행패만 부리는 ‘차브’(양아치) 취급이나 받는다. 그래도 영국은 문화의 힘과 역사를 통해 쌓은 대학의 역량으로 그나마 버티고 있다. 노동계급의 역사는 각 도시의 민중사박물관에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그럼에도 노동계급의 분노는 막을 수 없었다. 브렉시트는 그 결과에 가깝다.

한국으로 눈을 돌려본다. 한국은 당장 제조업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남동임해공업지역의 산업 종사자만 수백만명이다. 그럼 제조업을 그대로 둘 수 있나? 그것도 아니다. 구조조정을 통해 부가가치를 높이거나 원가를 줄여야 한다. 생산직 숙련도를 최고로 올려 최고급 기술로 먹고살든지, 제품개발과 엔지니어링만 남기고 생산을 인건비가 싼 나라로 외주화시켜야 한다. 이주노동자를 많이 고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기술고도화를 통해 공장 내부의 노동력 구성을 바꿀 수도 있다. 원래 GM의 공장이었던 테슬라 공장은 다시 문을 열 때, 비슷한 인원을 고용했다. 생산직은 줄었지만 고학력 설계 엔지니어와 디자이너가 늘었다.

고민이 깊었다. 소용돌이 속에서 착실히 생산현장을 지키며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해온 기존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존엄은 지켜질 수 있을까? 인력을 외주화하거나 해고를 해야 하는 것은 기업의 사정이라 하더라도, 지자체와 국가는 당장 준비하고 대비할 게 얼마나 많은가. 뜨거운 정치의 계절, 대선 후보들의 경제와 산업 공약에서는 이런 위기의식이 반영되고는 있을까?

양승훈 |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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