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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빵장수일 뿐이라오. 다른 뭐라고는 말 못하겠소. 예전에, 그러니까 몇십년 전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을지 몰라요. 지금은 그저 빵장수일 뿐이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일의 변명이 될 순 없겠지요. 그러나 진심으로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이 엄마에게 “댁 아드님에 대해 뭐 잊으신 것 없수?”라며 반복적으로 전화를 걸어 비아냥대면서, 빵집 주인은 조금도 알지 못했다. ‘댁 아드님’은 생일케이크 주문하였던 바로 그날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으로 실려 갔었다는 것을. 의식을 잃은 어린 아들의 병상을 일주일째 뜬눈으로 지키며 젊은 부부의 몸과 마음은 생선가시 발리듯 뜯겨갔다는 사실을. 그리고 결국 아이는 세상을 떠났음을. 그는 그저 자신이 공들여 구워낸 생일케이크를 찾아가지 않은 예약 손님에게 화가 난 나머지 수화기에 대고 좀 이죽거렸을 따름이었다.

어스름한 새벽녘에 빵집 문을 두드리고서 “그 애는 죽었다구. 이 못된 놈아!”라며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 엄마와 “부끄러운 줄 아세요”라 쏘아붙이던 아이 아빠를 앞에 두고, 그는 횡설수설 미안함을 전하고, 더듬더듬 위로를 건넨다. 그러다 부부를 안으로 들여 탁자 앞에 앉힌 후 갓 구워낸 빵을 건넨다.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라며, 그들이 접시에 놓인 빵을 하나씩 집어 먹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린다. “롤빵은 따뜻하고 달콤”했으며, 아이 엄마는 “롤빵을 세 개나 먹어 빵집 주인을 기쁘게” 한다.

이렇듯 빵집 주인은 자신이 무심코 던진 돌로 인해 낯선 부부에게 미안함과 연민을 갖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이 잃은 부모의 아픔을 온전히 보듬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불어 짊어지고 살 수는 더더욱 없을 테다. 본인 말대로 그저 한 사람의 빵장수일 따름이니까. 바로 그 빵장수만의 방식으로, 도움이 되고자 무언가 끌러놓는 저 장면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준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A Small, Good Thing〉의 마지막 장면이다.

여러해 전 어느 늦은 저녁, 필자는 길에서 울고 있었다. 어딘가로 찾아들어 마음을 누이고 싶었고, 떠오르는 장소가 당시에는 성당 정도밖에 없었다. 지나던 택시를 무작정 잡아타고 “명동성당 가주시겠어요?”하였다. 그리고 택시 안에서 다시 울었다. 기사분은 뒷좌석을 물끄러미 보시더니 아무 말 않고, 듣고 계시던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의 볼륨을 줄였다. 그리고 치지직 주파수를 돌렸다. 이내 경건하고 고요한 노래가 들려왔다. 조스캥 데프레가 작곡한 ‘아베 마리아’라고 라디오 진행자가 알려주었다. 뒤이어 그레고리안 풍의 단조로운 노래도 흘러나왔다. KBS 클래식FM이었던 듯한데, 그 시간에 성모 마리아를 주제로 한 고음악을 특집으로 선곡했던가 보다. 여기저기서 자동차 클랙슨이 울리던 캄캄한 월요일 밤, 퇴계로 부근의 택시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아베 마리아와 살베 레지나와 마니피캇을 함께 들었다. 어느덧 울음은 스르르 잦아들었다.

그날 밤 신에게 무엇을 간절히 빌었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엇이 그리 힘들었던지도 가물가물하다. 다만 성당으로 가달라며 울던 승객을 위해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를 희생하고 그 노래들을 같이 들어주신 택시 아저씨의 마음은 기억한다. 말하자면 당시 위로는 잠자코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택시 아저씨의 손길을 통해 건네졌던 것이다.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서 ‘세상읽기’인지 의아해하실지 모르겠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예리하게 분석해주실 정치·경제적 현안들과 ‘세상을 바꾸는 방안’에 필자의 서툰 논평을 한 줄 더 얹는 대신, 필자는 그 세상에서 떼어놓는 작은 발걸음들에 시선을 두고자 하였다. 핵문제가 해결되고 적폐청산이 되고 나쁜 자들이 감옥에 가도 여전히 견고하게 지속될, 제도를 몸통으로 하고 자본을 심장으로 한 체제. 그 안에서 힘겨워할 우리가 서로에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찰나들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 글은 그 첫 시도다.

<이소영 제주대 교수 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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