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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음달 7~8일 한국을 방문한다. 정상회담을 하고 국회연설도 한다. 트럼프 방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를 예측해 가면서, 방한을 기회로 우리가 그에게 전할 말을 준비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언동을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언론이 평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는 이익을 내기 위해 이악스럽게 계산하고, 상대방이 물건을 사도록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는 ‘실속형’ 정치인으로 보인다. 그의 말폭탄 뒤에는 고도의 계산과 의도가 숨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헤리티지 재단 대통령 클럽 회의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9일 트럼프는 지금까지의 말폭탄과는 결이 다른 말을 했다. “지난 25년간 북한에 수십억달러를 줬지만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잉크가 마르기 전 합의가 위반됐다.” 이 말에는 무슨 복선이 깔려 있을까? 우선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미국은 그동안 핵문제 때문에 북한에 ‘수십억달러’를 준 적이 없다.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1994년 10월)에 따라 북핵활동 중단 대가로 1996년부터 2002년까지 매년 중유 50만t을 현물로 준 적은 있다. 1998년 8월 제기된 ‘금창리 지하동굴 핵활동’ 의혹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자 벌금조로 식량 60만t을 북한에 준 적도 있다. 미국이 북한에 준 건 중유 350만t, 식량 60만t뿐이고 그 가격은 도합 5억달러 정도였다. ‘수십억달러’를 줬다는 건 과장이다.

“잉크가 마르기 전 합의가 위반됐다”는 말도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2005년 9월19일 베이징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이 합의·발표됐다. 그런데 그 다음날 미 재무부가 마카오 BDA은행의 북한계좌 2500만달러를 동결시켰다. 북한은 즉각 미국을 비난했고 핵활동을 재개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06년 10월9일 1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9·19공동성명의 잉크가 마르기 전 합의가 깨진 건 사실이지만, 북한의 책임이라고 떠넘기는 건 왜곡이다.

그러면 트럼프는 왜 이런 말을 할까? 사실을 좀 과장하고 왜곡해서라도 장차 대북 협상무용론을 밀어붙이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향후 협상무용론에 따라 대북 압박·제재가 더 강화되면 한반도 안보위기는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트럼프는 ‘겁먹은’ 한국을 상대로 안보장사를 할 것이다. 우리가 경계하면서 대비해야 할 점이다. 한편 20일 최선희 북한 북미국장이 모스크바 국제회의에서 ‘북핵무기 협상불가’를 말했다. 트럼프 방한을 의식한 발언 같다.

이것이 대북압박론자들의 주장에 원용될 수도 있겠지만, 최선희 말에도 숨은 뜻이 있다. 조성렬 박사는 “대화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조건 없는 대화로 시작하자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대화용의는 있지만 처음부터 비핵화를 전제로 하는 회담은 안 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방한을 앞두고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에 부탁한다. 트럼프의 입만 쳐다보면서 정치공방이나 벌일 정도로 한가한 때가 아니다. 여야 모두가 북·미 대화·협상을 트럼프에게 적극 권고해주기 바란다. 안보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을 생각하면 야당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 1993~1994년 북·미 협상으로 북핵 문제 해결 모델을 만들었던 로버트 갈루치 전 동아·태차관보는 16일 연세대 강연에서 어렵지만 북핵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했다. “제재는 해결책이 아니다. ‘조건 없는 협상’을 시작하라. 거기서 북한이 무엇을 원하는지 듣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하되 그 대가는 제공해야 한다. 북핵 포기가 쉽지 않지만 가능하다.” 갈루치의 말은 미 진보진영의 목소리이고, 트럼프 정부 내 국무장관, 국방장관도 대화와 협상을 얘기했다.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전쟁 불가’까지는 강하게 얘기했다. 트럼프 방한을 계기로 ‘한반도 운전자론’에 입각해서 ‘대화·협상 불가피’를 적극 설득해 나갈 차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대통령으로부터 국민이 들어야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대통령이 그렇게 발언할 때마다 국민은 절망스럽다. 신바람 나게는 못하더라도 희망의 끈조차 놓게 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황재옥 | 한반도평화포럼 여성·청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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