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처음 지방에 내려왔을 때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좋았다. 지역의 토속 음식도 맛있고, 내비게이션에 나오지 않는 구불구불한 논둑길을 따라 차를 모는 것도, 흙길을 걷는 것도 낭만이었다. 지방 생활 1년이 지나자 깨닫기 시작했다. 가장 맛있는 음식점은 서울에 있고 지역특산 최상품은 곧장 서울로 공수되고 있다는 것을. 시골길은 맞은편에서 차가 오기라도 하면 백미러를 접고 간신히 지나가야 하는 위험한 곡예길이자 흙먼지를 뒤집어써야 하는 비포장도로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교통체증이 거의 없는 지방 고속도로에 환호했으나, 차 한 대 없는 컴컴한 텅 빈 고속도로의 질주는 공포로 변했다.

연극, 뮤지컬은커녕 예술영화 한 편 극장에서 볼 수 없고, 마땅한 일자리가 거의 없어 학생들 대부분이 서울로 가지 않으면 거의 알바생으로 연명해야 하는 이곳은 문화적·경제적 불모지였다. ‘슬로시티’와 ‘청정’의 삶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낙후’와 ‘불모’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나는 어쩌다의 상경길에서 서울의 화려한 야경과 63빌딩을 보면, 나도 모르게 ‘와’ 하고 감탄하는 촌뜨기가 되었다.

어느 날 예의 논둑길로 차를 몰고 가다가, 논두렁에 처박혀 있는 검은색 승용차를 발견했다. 벌러덩 뒤집혀 있는 그 낡은 차는 며칠이 지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 차가 사라진 뒤에도 잔영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운전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인적 없는 이곳에서 그는 탈출했을까? 지도에도 없는 어느 후미진 길에서 외친 조난자의 절규를 누군가가 듣긴 했을까?

매스컴을 보면, 확실히 내가 살아가는 이곳은 한국 사회의 지도에도, 현실의 내비에도 없는 ‘컴컴한 논둑길’이 맞다. TV와 포털, 신문에 이곳의 삶은 없다. 연초 경향신문의 기획연재 ‘부들부들 청년’에 ‘지난해 인서울(In-Seoul) 4년제 대학 진학자는 7.17%에 불과하고, 29.75%는 서울 외 지역 4년제 대학에, 20.26%는 전문대에 진학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에 따르면 7.17% 외의 청년들은 “‘헬조선’이 뭐예요?”라고 되묻기도 했다고 한다.

청년공감 회원들의 헬조선 뒤집기 딱지치기 퍼포먼스 _경향DB

우리 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헬조선’이니 ‘수저계급론’에 대해서 알고는 있으나, 이에 대한 어떤 적극적인 감정을 표명하지 않는다. 분노하고 어떤 개입을 독려하는 선생을 멀뚱히 쳐다보는 경우가 많다. 인서울 하지 못한 지잡대는 온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권위적 목소리에 잘 순응했기 때문이다. 비단 사회이슈에서만 그럴까. 강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대체로 방관자적 태도로 뒷자리와 가장자리를 고수하려는 이들에게 ‘너희들이 바퀴벌레냐, 벽에 가서 달라붙게’라고 웃픈 농담을 하지만, 생애 대부분을 ‘들러리’ 역할에 충실했던 이들의 태도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들러리에게 이 사회를 이끌어갈 주체성과 책임의식, 공동체적 삶에 대해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개그이다. 스피박 식으로 말하면 ‘입이 없는 하위주체’들에게 어떤 주체적 행동을 요구하겠는가. 어느 논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 )에 알맞은 단어를 넣어보시길.

“일반적으로 사람은 ( )로 접어들면서 사회적 관계망이 감소 내지 단절됨으로써 사회적 상호작용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이러한 현상은 ( ) 본인들의 욕구와는 별개이다. 그 결과 ( )들은 주변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부정적인 자아개념을 형성하게 됨으로써 자아존중감이 크게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 )들은 쉽게 좌절하며 강한 열등감으로 인해 불안한 심리상태와 함께 소극적인 생활태도를 갖게 된다.”

정답은 노년기, 노인이지만 청년기, 청년으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관계에 서툴러 오타쿠 아닌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버린 청춘들, 부정적 자아의식과 열등감, 빈곤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이곳 청년들은 거의 독거노인과 다름없다.

기숙사나 자취생활을 많이 하는 지방대 학생들은 절대적으로 외롭고, 편의점의 라면과 삼각김밥으로 때우는 궁색한 생활을 하기 쉽다. 육체적·정신적 질병을 앓아도 고립돼 있어 방치되기 쉽다. 대학 신입생들 수업에서 어떻게 ‘독거’를 잘 영위해 나갈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한다든가, 짝꿍을 만들어주어 서로 생존을 확인토록 하는 일은 웃기지만 실제 현실이다.

이런 그들을 보면, ‘20대 개새끼론’이나 청년 보수화 담론이 얼마나 실제와 거리가 있는지 알게 된다. 청년의 보수성은 기존 체제나 가치관을 수호하고 지켜나가려는 것이 아니다. 인서울의 7%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수는 있다. 그러나 사대문 밖에서 살아가는 청년의 보수는 ‘노오력하지 않는’ 이기적 개인의 그것이 아니라 노력의 기회조차 박탈당한 자의 강요된 침묵이자 소외의 결과물이다.

길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운전대를 잡고 앞만 보는 청년들, 보수가 변화를 싫어하고 자기보존 욕구가 강한 것이라면, 최소한 내 주위의 청년들은 보수가 맞다. 그러나 그 보수는 변화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무력한 보수, 지킬 게 많은 보수가 아니라 논두렁에 처박히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안전을 추구하는 재난의 보수일 것이다.


정은경 | 문화평론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