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지방의 사립학교다. 조선시대 마지막 왕인 순종 때 설립된 꽤 오래된 학교라는 점을 빼곤 평범한 여고였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사회 활동을 하면서 동문을 만나 본 적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고교서열화가 암묵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 사회 기준으로 봤을 때 내세울 만한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창피해 할 학교도 아니었다.

몇 년 전 학교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됐다. 당시 교장 주도로 학교생활기록부 조작 사건이 발생했고, 그 사건으로 학교는 경찰 수사를 받았으며 해당 교장은 불명예 퇴진을 했다는 것이다.

그 교장은 고1 때 나를 가르쳤던 국어 선생님이셨다. 지금의 내 나이 정도 혹은 더 젊었을까. 당시 선생님은 수업에 열의가 있었고 사고방식도 유연한 편이라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어쩌다가 그런 일이 생겼을까 잠시 안타까움이 일었지만 사는 게 바빠 그 뒤로 잊고 지냈다.

최근 일 때문에 만난 한 입시전문가로부터 다시 내 모교 이야기를 듣게 됐다. 강남 숙명여고의 시험지 유출 의혹 사건에 대해 언급하던 중이었다. “지방 학교로 입시설명회를 다닐 때 보면 보통 학교장은 얼굴도 안 내비치고 교감이 인사하는 게 일반적이에요. 그런데 몇 년 전 ○○여고를 방문했는데 교장이 직접 나오더니 교장실로 안내하는 게 아니겠어요? 들어가보니 음식이 차려져 있고 다른 교사들도 배석해 있어 놀랐어요. 그러고 나서 몇 달 후 이 학교에서 내신비리 사건이 터졌죠.”

좋은 입시결과를 내보겠다는 교사의 열망이 지나치면 비리에도 쉽게 무뎌지는 걸까. 제자가 아닌 자녀 성적 조작 의혹을 받고 있는 숙명여고와는 경우가 사뭇 다르지만 두 사건 모두 학교생활기록부라는 내신 때문에 발생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대입 전형에서 내신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아지면서 내신 경쟁의 불투명성, 불공정성도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신 불신이 심화되면서 수능에 근거한 ‘정시’ 확대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정부도 2022학년도 대입부터 정시 비중을 더 늘리기로 했다. 이 논쟁에서 정시 확대가 강남 8학군, 외고·자사고에 유리하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정시 지지층에선 내신 기반의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야말로 고액 컨설팅 등으로 강남에 더 유리한 전형이라고 말하고 있고, 이에 대해선 교사와 전문가들조차 의견이 엇갈린다.

더 들여다보면 학종에 대한 반감은 패자부활의 가능성을 줄이는 시스템에 있는 듯하다. “한국은 매우 짧은 기간에 저개발 전통사회에서 선진경제 국가로 성장했다”는 유발 하라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국은 한 세기 만에 엄청난 변화를 겪은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나라다. 그 같은 변화는 교육이 이끌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교육지표 2018을 봐도 한국은 교육을 통한 계층이동의 열망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높다. 그런데 학종의 경우 뒤늦게 철들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지 못하고 있다. 내신으로는 원하는 대학을 갈 수 없으니 재수를 하게 되는데 패자부활전 성격의 정시를 줄이고 100% 학종으로 바꾸겠다고 하니 이 사달이 난 게 아닌가 싶다. 평소 학종 지지파였던 지인들의 입에서조차 “(자녀가) 만점에 가까운 수능 성적에도 불구하고 (내신이 안 좋아) 원하는 대학을 못 갔다”, “고2 때부터 공부해 현재 내신 1등급이지만 3년치를 계산해보니 학종으로는 좋은 대학은 어림없더라” 등 볼멘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 번 실패는 영원한 실패’라는 공포가 퍼지고 있다. 대학입시 과정에서 체화된 이 논리는 대학 졸업 후 공시족 등 각종 시험족을 낳는 또 다른 이유가 되고 있다.

<문주영 정책사회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