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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단 한 번의 여행을 떠나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다. 우선 자신이 가고 싶은 장소를 선정하고 그곳으로 가는 최적의 지름길을 찾아야 한다. 남들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는 사람을 ‘영웅’이라 부른다.

그가 가는 곳은 GPS에도 없고, 지도에도 없고, 안내책자에도 없다. 찰스 다윈, 헨리 포드, 에이브러햄 링컨, 알렉산더, 마리 퀴리, 라이트 형제, 모차르트 등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영웅들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들어올린 한 발 한 발이 새로운 길이 되었다. 아브라함 종교의 창시자들인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도 날마다 새로운 길을 떠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부정적 수용능력’이다. ‘부정적 수용능력’이란 자신을 엄습하는 불안감, 초조함, 질시, 외로움, 우울함, 애매모호함을 오히려 자신이 상상한 찬란한 미래의 굳건한 발판으로 만드는 능력이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한 영웅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모세는 기원전 13세기경 외국인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이란 의미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이집트 왕 파라오의 양자가 되었다. 자신과 같은 외국인 노동자가 이집트인들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그 이집트인을 살해한다.

그는 그 이후 40년 동안 살인자이며 도망자로 산다. 그가 도망친 장소는 지구상에서 가장 화산 활동이 심한 시나이 반도다. 이곳은 거칠고 황량한 땅이지만 살인자 모세를 민족의 구원자 모세로 변화시킨 도장이었다. 양떼를 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모세가 어느 날 더 이상 갈 수 없는 사막을 가로질러 그 이상으로 가보기로 결심한다. 그는 사람들이 갈 수 없는 사막의 끝에 도달해, 그 사막마저 건너간다. 그곳엔 신이 산다는 높은 산이 있었다. 이 산은 에베레스트와 같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산이 아니라, 모세만이 갈 수 있는 자신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 심연의 산이다.

그곳에 들어서게 되면 발견하는 한 가지가 있다. 자신이 매일 경험하는 일상(日常)이 천상(天上)이란 사실이다. 모세는 40년 동안 지겹게 보던 가시덤불에서 불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이나 연기가 나지 않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한다. 이 이야기는 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이 경험한 신기한 이야기다. 모세는 이 신기한 가시덤불에 다가가니, 그 안에서 한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을 듣는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는 사막에 흔히 너부러져 있는 가시덤불 안에서도 신을 발견할 수 있는 영적인 인간이 된 것이다. 그 목소리는 말한다. “샌들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그곳은 거룩한 땅이다!” 우리는 중동 지역에서 항의의 표시로 신발을 던지는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미디어를 통해 종종 듣는다. 자신의 모든 것, 즉 신발을 내버릴 정도로 상대방을 혐오한다는 의미다. 그 신비한 내면의 소리가 모세에게 알려준 최고의 가르침은 ‘바로 네가 서 있는 그 장소, 네가 40년 동안 지겹도록 다녔던 그 먼지 나고 더러운 그 장소가 바로 천국’이라는 깨달음이다.

이스라엘 모세의 떨기나무 (출처 : 경향DB)


유대인들은 ‘네가 서 있는 그곳’이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마콤(maqom)’을 바로 ‘천국’으로 여겼다. 천국은 사후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지겹도록 삶의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바로 ‘여기’다. 내면의 목소리는 자신의 일상이 자기혁신의 시작이라고 속삭인다. 이 내면의 소리를 듣는 자가 위대한 리더가 될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내면의 소리를 가시덤불과 같이 보잘것없다고 여겨 무시한다. 우리의 가슴속에서 불타고 있는 가시덤불은 귀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발견하는 자가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있다.

사막이나 가시덤불과 같이 어렵고 보잘것없는 장소가 창조를 위한 유일한 공간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자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우주 창조 이야기를 기록한 <티마이우스>에 이 공간을 소개한다. 그는 이 공간을 ‘코라’라고 불렀다. 코라는 원래 도시와 사막 사이에 버려진 땅을 의미한다. 그러나 ‘코라’는 만물을 소생시키고 어머니처럼 아이에게 젖을 먹여 일으켜 세우는 장소다. 한마디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장소이다. 인간 삶에 비추어 보자면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있어야 할 본연의 장소이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코라’를 거쳐야 한다.

모세의 가시덤불이나 플라톤의 코라는 우리가 부정하고 감추고 싶은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만나는 어렵고 당황스러운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틀 안에서 쉽게 그 해답을 찾으려 시도한다. 그러나 모세나 플라톤은 그 해답을 기존 질서 안에서 쉽게 이해하려 노력하거나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이들의 능력을 ‘부정적 수용능력’이라 부른다. 이 능력은 그 어려운 상태를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의 일부로 가지고 가는 삶의 태도이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이런 모순들을 편리성과 효율성을 위해 만든 이성적인 체계 안에 가두려고 시도하지 않았는가?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1795~1821)는 어린 시절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으로 남들과 어울릴 수 없었고 청년 시절 우울증에 시달렸지만 영국이 자랑하는 최고 시인이 되었다. 그의 다채로운 언어와 상상력이 오늘날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위대함의 비결은 자신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자신의 찬란한 삶을 위한 지렛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실이나 이성을 성마르게 추종하지 않고 불확실하고 신비하고 의심스러운 상태에 의연하게 거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우리가 경험한 불완전한 삶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발굴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인내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내 마음 안에 있는 ‘꺼지지 않는 가시덤불’은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그 소리에 응답하는 자가 자신만의 별을 창공에 다는 사람이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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