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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회 | 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내 가슴은 뛰누나(My heart lifts up)’에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어린이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동심의 순수성을 어른들은 이미 잃어버렸고, 이제는 그것이 어른들의 삶에 근원적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H F 아미엘도 “어린이들의 존재는 이 땅에서 가장 빛나는 혜택이며, 이들을 통해서만 지상에서 천국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동심이 마음의 고향인 것은, 젊은이가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과 같이 인간의 세대교체에 숨어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런데 그 비밀에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형상을 부여한 숲의 나라가 있다.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타고 남녘 바다 가까이 남하하다가 고성 나들목으로 나가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동시동화나무의 숲’이란 자연 공원이 있다. 주소로는 경남 고성군 대가면이고 그 면적은 모두 5만2800여㎡(1만6000평)에 이른다. 



(경향신문DB)



이 숲에 도달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서로 이마를 맞대고 있는 서너 채의 촌가를 지나 그야말로 자연 속에 숨쉬는 작은 숲길이요, 다른 하나는 뒷산 마루턱에서부터 어렵게 닦은 경사로를 타고 여러 굽이를 돌아 내려가는 좁은 찻길이다. 둘 다 세속적 삶의 일상을 벗어나기에 꼭 알맞은 거리를 가졌다.


숲의 중심, 평평하게 고른 땅에는 연면적 약 400㎡(120평) 규모의 산뜻한 2층 건물과 그 곁의 부속 건물이 있고 산 아래쪽으로는 관리숙소, 차고 맑은 계곡의 물가에 아담한 정자도 있다. 눈을 들면 산골짜기에 이어진 들판을 따라 고성읍내의 시가지가 원경으로 내려다보인다. 중간 어름에 놓인 저수지는 무슨 전설 어린 호수처럼 고즈넉하다. 이 호수는 날이 저물어 달빛 별빛을 수면에 담을 때 온전히 제 몫을 다한다. 숲의 한가운데서 굳은 땅을 차고 선 현대식 건물은 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깨지 않도록 애쓴 기색이 역력하다. 이 건물에는 ‘열린아동문학관’이란 명호가 부여됐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지금껏 묘사한 이 숲의 청아한 풍경이나 모양새가 아니다.


숲에 서 있는 수많은 나무 하나하나가 아동문학가 누구누구의 것이라는 이름표를 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름은 작가의 이름과 작품 및 발표 지면을 적을 수 있는 크기의 자연석에 새겼고 길을 따라 바라보이는 방향의 나무 발치에 놓였다. 지금까지 43명의 작가가 이 숲의 주인으로 참여했고 해마다 18명씩 늘어날 예정인데, 해가 가고 세월이 바뀌면 제 이름을 가진 한국의 모든 아동문학가들은 이 산에 불려와 숲을 지켜야 할 형국이다. 국내의 곳곳에 문학관이나 문학 테마파크가 있으나, 이처럼 참신한 발상과 마주치기는 정말 처음이다.


돌에 새겨진 발표 지면은 부산에서 발행되는 계간 문예지 ‘열린아동문학’이다. 이 잡지의 원고료는 교환가치로 환산된 금액이 아니라 잘 추수된 곡식과 철따라 나는 과일·야채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아동문학을 하는 문인들에게서 이 지면에 글을 싣고자 하는 의욕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초심을 훼손하지 않고 소중하게 가꾸어 나간다면, 우리는 100여년 역사의 한국 현대문학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문학운동의 목격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숲의 산지기는 동화작가 배익천씨와 열린아동문학 발행인 홍종관·박미숙씨 부부이다. 이들의 깊고 오랜 우정과 아동문학을 향한 사심 없는 헌신이 이 숲을 여기까지 키웠다.


어린이를 귀하게 알고 그 마음을 가치 있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없다면, 세상의 삶이 얼마나 각박할지 알 수가 없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끌어안는 문학도 그 출발점을 거기에 두어야 마땅하다. 세상살이가 어렵고 팍팍할수록 순수의 원형을 비추는 거울로서 동심을 되새길 수 있다면, 우리도 누구나 각기 마음에 가꾼 동화나무 숲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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