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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비평을 가르치다 보면 비평을 작품에 대한 평가라고만 여기는 학생을 많이 본다. 학생들은 비평가가 권력을 가지고 작품을 쓴 사람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훈수’를 둘 수 있다고 여긴다. 이러한 행위는 인터넷의 아마추어 글쓰기 공간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비평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작품을 난도질하고, 작품에 쓰레기 등의 악랄한 딱지를 남긴다. 그 모든 이유는 ‘비평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평이라는 것이 학술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행위이니만큼 작품의 문학적 성취를 논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동시에 비평은 작품 속에서 구현된 가치를 찾아내는 작업이고 때론 과거의 작품을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볼 수 있도록 연결 짓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중은 왜 비평가를 단순히 평가하는 사람, 그것도 작품이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을 구분 짓는 감식원처럼 이해할까. 그건 대중에게 가장 많이 노출되는 비평이 그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매년 신춘문예를 장식하는 심사평이나 작은 공모전의 심사평 등등. “지금 이 비평의 선언으로부터 당신은 ‘등단’ 작가입니다. 아, 당신은 아니고요.”

이건 문학이라는 공간만이 아니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미디어를 가득 채운 이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평’은 심사평이 되었다. 이러한 이분법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기가 소비하는 대상에 대해서 ‘비평’을 흉내 낸다. 대중의 이러한 인식은 문학과 문단에 자리 잡은 ‘권력’, 그리고 비평가와 심사자가 외부에 어떻게 보이는지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지난 10일, 다이섹슈얼이라는 트위터 계정이 김봉곤 작가의 작품 <그런 생활>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했다. 해당 소설 속에선 계정의 주인과 김봉곤 작가의 내밀한 카톡 내용이 허가 없이, 그리고 수정 없이 그대로 게재되었다. 성적인 내용까지 포함되었기에 친구 사이의 내밀한 카톡이 갑작스럽게 공표되자 당사자는 작가를 비롯해 문학동네, 창비 두 출판사에 수정과 수정 사안에 대한 공지를 요구했다. 수정은 이루어졌지만 수정 이유를 공지해달라는 것에 대해서는 두 출판사 모두 ‘작가와 당사자의 주장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거부했다.

김봉곤 작가는 해당 작품으로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문학동네는 심사위원들에게 소통 과정에 오해가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고쳐 쓴 원고가 심사 결과에 영향이 있을지 판단을 구했다. 심사위원들은 해당 내용이 전체 작품을 판단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며 심사 결과를 유지했다. 이 과정엔 문학과 작가만 남고 피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트위터에만 13일 입장문을 공개했다 항의를 받고 14일에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부랴부랴 입장문을 게시한 문학동네의 행보나, 14일까지 침묵하다 입장문을 올린 창비의 행보도 아쉽지만, 11일 가장 빠르게 입장문을 게시한 김봉곤 작가의 답변은 더 허무하다. 문학동네와 창비의 입장문에 나온 “작가와 당사자 간의 의견 교환과 합의”의 이야기는 한 줄도 언급되지 않는다. 당사자가 10일 첫 문제 제기부터 “원고 수정 사실을 공지해달라는 제 요청은 지금까지도 무시당하고 있습니다”라고 뚜렷하게 명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젊은’ 평론가와 문학인들이 이러한 사안에 대해 입을 열어 비판하고 있지만 그 파급은 문학사상과 관련된 이슈와 비교했을 땐 무척이나 미미하다. 똑같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이슈가 된 것인데 그 차이가 무엇일까. 친일 문인의 문학상 문제부터 다양한 이슈와 함께하는 이때 무엇이 ‘문학’적인 행위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가.

n번방에서부터 고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추문까지 젠더 이슈가 가득 찬 사회에서 ‘문학’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사건과 별개로 작품의 예술성이 손상되지 않는다고 ‘선언’한 심사위원들의 판단은 오히려 문학을 대중과 사회, 시대로부터 격리하고 블랙박스 속으로 감춰두는 것이 아닐까.

<이융희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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