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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덥다. 상당수 국민은 온종일 밖에서 일하거나, 전기료 무서워 에어컨도 제대로 켜지 못하고 있을 거다. 한 세기 전만 해도 날씨는 임금님 성정과 통치의 결과물이었다. 수해든 풍년이든 마찬가지. 이런 세태는 지금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많이 줄었다. 그 이유는 사회가 발전하면서 이성적 판단을 통한 합리적인 선택이 쉬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반대로,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합리적 선택이 필요해 이성적 판단이 동원됐을 수도 있다. 국민 입장에서 국가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 결정하는 능력과 결정된 일을 집행하는 능력이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 둘 다 중요하지만, 단연 결정능력이다.

아침 최저기온이 111년 만에 최고를 기록한 23일 서울 중구 한국전력공사 서울지역본부의 전력수급 현황 모니터에 전력 공급예비율이 9.9%로 표시돼 있다. 올해 들어 전력 예비율이 10% 밑으로 떨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연합뉴스

이번 국회 전반기. 의원발의 법률안은 1만3000여건. 그중 처리 건수는 3500여건이다. 역대 국회 중 발의 및 처리 건수가 최고치라고 한다. 이에 비례해 행정부 법률안의 시행령과 시행규칙은 물론이고 대통령령, 총리령, 부령 등 크고 작은 의사결정이 수없이 많다. 의사결정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양도 문제지만, 결정의 질은 어떨까. 대의제와 전문성만을 중시하기엔, 다양하고 복잡하게 고려하여 결정되어야 할 문제들이 많다. 어떻게 하면 많은 양의 질 높은 의사결정이 가능할까. 국가의 의사결정시스템이 임계점을 맞이하기 전에, 국민 참여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슈가 국민의 삶과 직결된 만큼, 직접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을 때 최적화된 의사결정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공론조사 창시자인 피시킨 스탠퍼드대학 교수는 ‘일반시민에게도 공적인 문제를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꼭 공론조사가 아니더라도, 여러 형태의 숙의와 토론이 가능한 의사결정 방식이 활용될 수 있다.

최근 이슈에 대한 국민반응을 소개하고자 한다. 판단의 권위나 전문성보다 더 중요한 관점, 즉 어떤 각도에서 이슈를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잘 녹아있다. 예컨대 논의가 지속되고 있는 낙태 문제는 요건 완화 찬반여부가 관건이다. 태아의 생명권, 임신부 및 부모의 자기결정권, 태아와 임신부의 건강권 등이 첨예하게 논쟁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논쟁의 이면엔 찬반을 넘어 매우 시급하고 개선해야 할 세부 문제가 도사린다. 수술환경이다. 합법적 낙태든, 불법적 낙태든 정상적인 수술환경에서 임신부가 수술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주어져야 한다. 제주 예멘난민 수용여부로 촉발된 난민이슈도 난민의 국내범죄율이 내국인범죄율보다 낮다는 사실 외에, 제주도의 5대 강력범죄 발생건수가 매우 높다는 현실이 고려되어야 한다. 당위론적 입장이 구체적인 현실을 반영할 수 있어야 반대편에 서 있는 시민들도 비인도주의자로 낙인찍지 않고 함께할 수 있다.

종합부동산세 개편도 비슷하다. 국민 다수는 공평과세를 원했다. 진짜 공평과세. 공시가격 현실화 없는, 공정가액제의 폐지 없는 공평과세가 어떤 의미인지 되묻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 이 이슈야말로 다양하고 복잡한 국가대표급 이슈다. 누군가에겐 불평등 완화를, 또 다른 누군가에겐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도 있는 조치다. 현장생태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통계와 데이터만으로 접근하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 왜 최저임금 인상에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가 아니라,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가 줄어드는지 말이다.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가 또 다른 누군가의 고용원은 아니었는지, 인건비 부담의 부당한 전가가 생산성 저하로 이어지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자영업자 고용보험가입률이 1% 내외인 상황에서 안전망 없이 내몰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사전에 살피기가 쉽지 않다. 앞으로도 이전보다 최저임금 인상이 큰 폭으로 진행된다면, 자영업자 고용보험가입의 단계적 의무화 및 그에 따른 높은 수준의 정부 부담률이 필요할 수 있다. 국민은 많은 이슈들 속에서 살고 있다. ‘국민은 바빠서’ 자신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촛불로 확인됐지만, 국민은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럼 국가는? 국가능력은 국민소통에 달렸다.

<최정묵 |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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