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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정당성은 “사리에 맞아 옳고 정의로운 성질”을 뜻합니다. 한 집단의 정당성은 사회에서 주어진 몫을 다함으로써 얻습니다. 교사는 학생을 잘 가르칠 때, 의사는 환자를 돌볼 때 우리는 그들의 정당성을 인정하죠. 학생 성 학대, 의료사고가 불거질 때마다 정당성이 약화함은 당연합니다.

군대의 정당성은 특별합니다. 그들이 가진 폭력의 독점 때문이죠. 외적의 위협을 막는 대신 가공할 살인 무기를 지니고 거대한 조직을 유지할 정당성을 가집니다. 그 정당성이 흔들리는 순간 군은 소임을 하기 힘들어질 뿐 아니라 사회를 위협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존재 이유마저 의심받을 수밖에 없죠.

이석구 기무사령관(오른쪽)이 20일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 의원들의 질문에 대답한 후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권호욱 기자

1950년 여름 한국군은 치욕적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불과 며칠 만에 서울을 적군에 내주었고, 한강 다리를 끊어 수많은 피란민을 죽였습니다. 미군 덕에 낙동강 전선을 겨우 지켰고, 미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간신히 전세를 역전했죠. 작전권을 다 내준 군은 그렇게 오욕의 역사를 열었습니다. 외국군에 기댄 초라한 초상화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북한 국방비의 여러 배를 … 한두 해도 아니고 근 20년간 이런 차이가 있는 국방비”를 쓰고 있는데도 국방력이 약하다고 징징거리며 “미국한테 매달려서, 미국 뒤에 숨어서” 있는 군, 2006년 당시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증언한 모습이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외적’을 막는, 가장 중요한 사명을 온전히 못하는 군대입니다.

기본적 사명이 뒷전이니 심심한 걸까요. 수십억원대의 방산비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왔죠. 음료수 하나라도 건네지 않고서는 일이 되지 않는 일상적 부패도 군을 뼛속까지 오염시켰습니다. 고질적 병영 내 폭력은 또 어떤가요. 보도되지 않는 폭력과 인권 유린이 얼마나 흔한지 다 압니다. 이런 군대니 사고가 잦은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가장 최근 해병 헬기 ‘마린온’은 회전날개가 빠지는 어이없는 사고를 내며 5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마린온의 모델인 ‘수리온’ 헬기도 이미 몇 년 전에 기체 및 엔진 등의 결함으로 안전사고가 잇따랐고 조사 후 검찰에 수사 의뢰하는 등 조처가 내려진 기종이었습니다.

이런 군대지만 유독 시민들 앞에서는 당당하고 무자비했습니다. 제주 항쟁에서 약 3만명의 시민이 군경의 손에 학살을 당했습니다. 4월의 혁명은 박정희 소장의 탱크로 좌절됐고 1980년의 봄은 전두환의 헬기로 쓰러졌죠. 이런 삐뚤어진 전통은 민주화로도 꺾을 수가 없나 봅니다. 이들이 또다시 국민을 짓밟으려 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기각을 전제로 군은 서울 광화문·여의도에 장갑차를 배치하고 국회와 언론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정부조직을 장악하고 평화적 시위를 진압할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죠.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계엄사를 편성하고 3사관학교 출신인 이순진 합참의장을 배제한 흔적도 보입니다. 계엄이라기보다는 친위 쿠데타에 가까운 사태가 날 뻔했지만 이를 보고받은 현 국방부 장관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죠.

누구의 변명대로 비상사태를 대비한 계획일 뿐이었다고 해도 사태는 심각합니다. 당시 서울 시내는 시민의 성숙한 시위로 평화롭기만 했죠. 협박은 박근혜 지지층에서 나왔고, 위험은 박근혜와 그 측근들만의 것이었습니다. 군이 나서서 처리할 어떠한 위협도 없었죠. 그러니 당시 군의 근심은 국민의 안위가 아닌 박근혜의 안녕이었던 겁니다.

부패와 각종 문제로 곪을 대로 곪은 군은 외부의 위협을 처리할 능력도 의사도 없어 보입니다. 오직 정권을 위해서만 총칼을 휘둘러 왔죠. 시민은 군의 보호 대신 협박과 폭력에 더 익숙해졌습니다. 그런 군대에서 “사리에 맞아 옳고 정의로운 성질”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진 듯합니다. 오늘 기무사 계엄 문건 사태는 이런 현실의 작은 예일 뿐입니다. 그러니 기무사 ‘개혁’을 떠드는 소리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요. 그 개혁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지만, 설사 개혁이 이루어저도 충분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죠. 그러니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군이 정말 필요할까요. 2년씩 청춘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의 대답을 기다려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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