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마당을 가진 집집마다 의자가 한 개쯤 꼭 있다. 나도 마당에 세어보니 의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여러 개. 내가 아니라도 새가 앉고 가끔 메뚜기나 사마귀, 무당벌레도 앉아. 흔들의자처럼 편한 그네도 하나 있는데 강아지랑 나는 보통 거기 앉거나 누워 해바라기를 즐겨. 발이 네 개인 의자는 울 강아지들처럼 정신없이 돌아다니지는 않아. 컹컹 짖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고요해. 온종일 인내심을 가지고 쭉 기다려. 영국 사람들에게 흐르는 습관이 하나 있는데 ‘기다리며 차를 한 잔 마시는 일’이다. 이때 보통 쓰는 말이 ‘서두르지 말 것(Take Your Time)’. 기다리다 보면 1. 일이 저절로 해결되는 수가 있다. 2. 내 마음이 변하고, 일이 달리 보인다. 3. 모든 일은 결국 때가 있기 마련이다. 독일 작가이자 명상가 하이델로레 클루게가 들려주는 조언. 또 그이는 이렇게 살아보라 권하더군. “감정을 억누르지 말고 드러낼 것.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이와 사귈 것. 마음이 흐르는 일에 열광하고 도취할 것. 새로운 일을 발견하여 흥미를 갖고 계발할 것. 타인에게 친절과 미소, 애정을 의식적으로 행할 것. 아니면 아니라고 말할 것.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찾아 움직일 것. 먼저 가서 기다릴 것!” 당신은 약속 시간보다 훨씬 먼저 가서 차 한 잔 시켜 놓고 누굴 기다려 본 적이 있는가? 

광주 금남로엔 오래 묵은 카페 <베토벤>이 있다. 난 고등학생 때부터 베토벤을 다녔는데, 일년에 한 번 찾아가도 단골은 단골. 법정 스님이 일 보러 오시면 들르곤 하셨던 찻집. 엊그제 벗들과 방문했는데 주인장 여사님이 “목사님. 절집 달력이라도 새해 선물로 드릴게요” 하면서 달력과 절집 소식지 하날 주셨다. 그 종이쪽지에 스님이 송광사 불일암에 계실 때 손수 만들어 놓고 앉으셨던 일명 ‘빠삐용 의자’ 사진이 있더라. 지금은 부서질까봐 어디다 보관하고 있다덩만. 그곳에 앉아 때를 기다리는 일, 이 고해의 세계를 탈출할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 의자는 우주선 발사대나 마찬가지렷다. 당신의 빠삐용 의자는 시방 어디에 있는가.

<임의진 목사·시인>

 

 

연재 | 임의진의 시골편지 - 경향신문

704건의 관련기사 연재기사 구독하기 도움말 연재기사를 구독하여 새로운 기사를 메일로 먼저 받아보세요.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검색 초기화

www.khan.co.kr

 

'일반 칼럼 > 임의진의 시골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도장  (0) 2022.12.08
동무동무 말동무  (0) 2022.12.01
눈구름  (0) 2022.11.24
마라닉  (0) 2022.11.17
비닐하우스 사람들  (0) 2022.11.10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