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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XX들! 박원순 지지하는 놈들은 다 빨갱이야.”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저자를 한 대 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2011년 10월, 박원순과 나경원이 맞붙은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기자들 몇이 경제부처 과장급 공무원과 저녁 자리를 가졌다. 누구를 지지하느냐가 자연스레 화젯거리가 됐다. 누군가가 즉석에서 가상투표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손을 들고 보니 박원순 지지가 일방적으로 많았다. 과장은 나경원 지지자였다. 그가 벌떡 일어서더니 삿대질과 함께 내던진 말이 “빨갱이 XX들”이었다. 자리를 떠나는 것으로 항의 표시를 했지만 밤새 분이 삭지 않았다. 그 선거에서 서울시민들은 박원순을 택했다.

그닥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은 며칠 전 또 다른 자리를 계기로 되살아났다. 세종시의 모 부처 관료들과 가진 자리였다. 한 사무관이 대뜸 “요즘 언론은 너무 좌편향적”이라고 말했다. 비선 실세 최순실 관련 보도에 대한 항의로 읽혔다. “도대체 좌파가 뭐냐”고 물었다. “정부에 반대하면 좌파”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명박·박근혜 보수정권 10년째다. 관료들은 한국 사회의 좌경화를 걱정하지만, 나는 되레 관료의 우경화를 걱정한다. 한국 사회가 왼쪽으로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너무 오른쪽으로 갔다. 한국에서 ‘우경화’는 ‘권위주의의 부활’과 이란성 쌍둥이다. 교육부는 국정교과서를 고집했고, 외교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를 나홀로 이뤄냈다. 국방부는 전격적으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한반도 배치를 결정하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했다. 마치 새벽에 밀어붙인 군사작전 같았다. 대화는 없었다.

자신을 비판한 개인과 단체는 ‘블랙리스트’로 묶었다. 가차 없었다. 문학계의 노벨상이라는 맨부커상을 받은 작가 한강도, 아시아 최고 영화제라는 부산국제영화제도, 경향신문도 딱지가 붙었다. 블랙리스트 명단은 1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블랙리스트는 표현만 달리했을 뿐 빨갱이의 다른 이름이다.

관료 개개인이 우경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10년간 누적된 인사의 결과로 보는 것이 옳다. 청와대는 수첩에 말을 잘 받아적는 ‘올드맨’들을 복귀시켰다. 그들은 시키는 대로 잘하는 관료들만 승진시켰다. 가뜩이나 가부장적 전통이 강한 특정 지역 인사들이 중용되면서 권위주의는 더욱 강화됐다. 부적절한 지시를 거부한 관료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쁜 사람’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끝내 옷을 벗었다. 그러니 우경화는 필연적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짓궂은 상상을 해본다. 만약 정권교체가 되면 어떻게 될까라고. 새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때 “빨갱이 정권과는 일 못하겠다”며 사표를 던질 관료가 얼마나 있을까? 나는 그럴 관료가 많지 않을 것이라 본다. 10년 전 정권교체 때 과감히 낯빛을 바꾸었던 관료들을 하도 많이 본 탓이다. 한 고위관료는 노무현 정부 당시 “종합부동산세는 내가 만들었다”고 외쳤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실은 태어나지 말아야 할 세금”이라고 말을 바꿨다. 그는 제 손으로 종부세를 무력화시켰고, 공공기관장으로 영전했다.

새 정권의 출범을 바라는 마음 한구석에는 권위주의에 절어 우경화된 관료들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는 개인적 갈망이 있다. 관료들의 도시인 세종시는 지난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야당의 손을 들어줬다. 기저에 흐르는 공심(公心)은 현 정권 주류와는 달랐다. 낮은 자세로 국민과 대화하고 소통하려는 관료들이 많다. 이들의 앞길을 터주기 위해서도 새 정부가 필요하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17년 신년사에서 “우리 의회 민주주의는 강하다. 협력과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면서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느냐고? 아니다. 반대와 비판도 요구된다”고 말했다. 메르켈 정부와 같은 철학을 가진 정권이라면 누구라도 좋다.

경제부 박병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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