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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1등 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어요. 공부 잘하는 쓰레기만 만들어내는 걸….”

“그러게요. 배려하고 함께 사는 법을 배울 기회나 있었을까요.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얼마나 떠받들어주며 오냐오냐 했겠어요.”

“아유, 그렇다고 1등 소용없으니 2등 하라고 하실 건가요? 인성이야 평소 부모 보고 배우는 거지 따로 시간 내서 가르칠 것도 아니고. 그런 쓰레기들한테 밟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런 자리에 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우아하게 시작된 그들의 대화는 약간 과격한 뒤끝을 남기며 마무리됐다. 얼마 전 모처에서 열린 예비 고3 학부모 설명회 자리였다. ‘최저’니, ‘입결’이니 하는 기본적인 입시용어도 모르는 불량 엄마로 계속 남을 순 없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예약을 했었다. 언뜻 보기에도 고수의 ‘포스’가 풍기는 엄마들 옆에 용케 자리를 잡은 뒤, 혹시 쓸 만한 정보라도 하나 건질까 하는 기대감으로 그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운 참이었다.

“도대체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라 걱정만큼이나 요즘 자주 들리는 하소연이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이에게 해줄 답이 없다는 부모들의 방황과 고민은 지하철 안에서도, 막창구이집 옆 테이블에서도, 카트를 밀고 선 대형마트 에스컬레이터 위에서도 들려온다.

어린 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어나와 시국선언을 하게 만드는 작금의 사태를 보며, 기성세대 일원으로서 일말의 자괴감에 고통스러웠던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여기에 더해 청문회라는 이름으로 지난 몇 주간 펼쳐진 ‘초특급 리얼 버라이어티 쇼’는 수많은 이들을 충격과 분노, 끝모를 무기력감으로 밀어넣었다. 검사와 변호사, 대학교수, 고위관료 등 1등만 하고 살아왔을 소위 최상위권 초엘리트들의 적나라한 민낯을 반복적으로 확인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사람이면 어릴 때부터 누구나 한번쯤은 듣고 자랐음직한 권면이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훌륭’은 사전적 의미가 아닌 세속적 성공일 테고, 그렇게 형성된 기득권층에 대단한 도덕성을 기대하는 국민도 많지 않다. 그래도 너무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그 빛나는 재능을 어둠의 세력에 갖다 바치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이 리얼 버라이어티 쇼는 천연덕스럽게 재연하고 확인시켰다. 그래서 충격파와 절망감이 더 컸다.

얼마 전 한 모임에서 국회의원 박주민의 이야기가 잠시 화제에 올랐다. 대원외고와 서울법대, 로펌을 거쳐 거리의 변호사가 된 그는 ‘금수저’를 가지고 흙을 퍼 먹는, 또 다른 의미로 역주행의 아이콘이다. “대단한 건 맞는데 내 자식이 그렇게 산다면 싫을 것 같아요. 지금 같은 결말은 아니라고 가정했을 때 같은 스펙이면 우병우나 조윤선처럼 살길 원하지, 박주민과 같은 길을 가길 바라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요.”

아무도 말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좀 더 인간답게 사는 세상, 아이들에게 물려줄 이상적 미래상을 저마다 설파하던 상황이었다. 내밀하게 감춰진 허위의식이 ‘뽀록’나고 있는데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사람은 없었다. “모의고사 평균 5등급이 목표인 학부모 앞에서 너무한 처사 아니냐”는 또 다른 참석자의 이야기에 다들 빵 터지고서야 화제가 전환됐다.

입으로는 인성이 중요하다고,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휴대폰을 잡고 빈둥거리는 아이의 뒤통수를 보면 “도대체 언제쯤 정신 차리려나” 싶어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자아분열을 반복적으로 겪는 나 같은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갑이 아니어도, 1등이 아니어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어 보듬는 것이다.

문화부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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