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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 이상이 같은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면, 그건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이다. 강간은 정치적인 문제이다.”

1971년 미국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쓴 <강간반대선언문> 속 문장이다. 여기서 ‘강간’이란 여러 성폭력을 아우르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그리고 성폭력이 정치적인 문제라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해결되지 않으며, 따라서 집단적인 움직임만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2016년 10월 대한민국에서, 이 사실을 깨달은 여성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SNS에서는 용광로처럼 부글거리는 열기와 에너지로 “#00_내_성폭력” 운동이 펼쳐지는 중이다.

웹툰계와 문단에서 일어난 성폭력에 대한 고발로부터 시작된 이 흐름은 이제 영화계, 미술계, 교육계 등을 넘어 군대 내 성폭력도 논의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로 이어지고 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다종다양한 성폭력을 폭로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한 반응은 생각보다 격렬하고 ‘파워풀’하다. 트위터 유저들의 말처럼 이는 “온라인 생존자 말하기 대회”나 마찬가지이다.

생활세계에서 벌어지는 성폭력의 문제에 여성들이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누구나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억들은 우리를 움츠리게 하고 우리의 행동을 단속해 왔다.

얼마 전 “몰카가 무서워서 순결을 지키는” 여성 청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순결이라는 단어에 ‘도덕’이 아니라 ‘공포’가 들러붙는 세상. 이건 확실히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두려움이다.

어떤 사람들 눈에는 기이해 보일 정도로 폭발적인 여성들의 비명은 이런 두려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공포가 용기와 집단행동으로 전화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련의 움직임 속에서 여자들이 힘을 가지기 시작한 것을 본다. 메갈리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의 진정한 의미 역시 여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이든, 세계를 망쳐버릴 수 있는 힘이든 말이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이 힘의 방향을 어디로 잡고, 무엇에 사용할 것이며, 그리하여 어떻게 더 단단하게 만들어 확장해 나갈 것인가다. 이 과제를 풀기 위해서 치열한 고민과 뜨거운 논쟁, 그리고 수많은 실험들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은 ‘즉각성과 머뭇거림 사이의 줄타기’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SNS에서는 폭로가 고통의 시간을 찢고 타임라인 위로 터져 나오면 그 내용이 바로 기정사실로 굳어진다. 타임라인은 들끓기 시작하고, 다른 목소리는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폭로가 곧바로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힘들게 목소리를 낸 이의 ‘무고’를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내’가 누구보다 발 빠르게 판관을 자처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의미다. 피해자의 고통에 감응하고 그를 지지하는 것은 즉각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판단과 대응에는 잠시 머뭇거릴 필요가 있다. 속전속결보다는 오히려 시간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더 힘든 싸움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폭로와 공감, 집단적인 움직임, 그리고 고발과 불매로 이어지는 속도전이 아직은 최선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남기는 상처는 깊다. 잠깐의 머뭇거림은 우리에게 복잡한 맥락을 고려하고 효과적인 전략을 짤 수 있는 간극을 만들어 준다.

우리는 더 많은 싸움의 기술을 고안하고 계발해야 한다. 힘을 가진 자에게 쉽게 복무하는 법이나 돈을 따라 가볍게 돌아서는 시장 논리에 기대는 것은 물론 효과적이고, 때로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만의 도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함께 주목해 볼 만한 ‘사건’들이 있다. 영화 <걷기왕>의 경우 스태프를 대상으로 성희롱 예방 교육을 진행하고, 콘티 북에 ‘성희롱 지침’을 실었다. 영화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스태프 중 한 명이었던 남순아씨의 제안 덕분이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지치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그 한 명의 페미니스트는 소중하다.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성폭력 범죄에 있어 ‘무고수사’를 사건 종결 후로 미루는 법률 개정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가 거는 무고죄와 명예훼손 고발은 피해자의 발목을 잡는 악질적인 꼼수다. 이를 법으로 막겠다는 것이다. 이 개정안에는 피해자의 과거를 증거자료로 채택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 역시 포함되어 있다. 이는 성폭력을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낙인효과를 막는 데 필수적이다.

이 진통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견인할 또 다른 ‘우리’를 조직해낼 수 있을까? 이제 열쇠는 우리의 손 위에 올라왔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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