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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사람들이 죽어간다

opinionX 2010. 6. 15. 15:48
가슴이 뛰었다. 박지성이 수비수 2명을 제치고 골문을 향해 질주할 때. 위스키나 면도기 광고에 나올 때의 어색한 박지성이 아니었다. 당당하고 위엄이 넘쳤다. 매혹적인 그의 질주는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인터넷의 관련기사마다 마우스를 옮겨대며 클릭하기 바빴다. 월드컵의 신은 내게도 이렇게 강림하셨다.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박지성의 왼발에 경배하던 시간, 서울 조계사에선 200여명의 사람들이 두 손 모아 기도하고 머리 숙여 절하고 있었다. 지난달 31일 소신공양(燒身供養)한 문수 스님을 추모하는 ‘1080배 참회 정진 기도회’였다.


조계사 일주문 앞에 25일 개원한 서울 한강선원에서 4대강 생명살림을 위한 24시간 참회정진 기도를 하던 수경스님이 기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2010-05-25 | 경향신문 DB
 

문수 스님이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 폐기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입적한 뒤 10여일이 흘렀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가. 6·2 지방선거가 치러졌고, 20·30대 젊은이들이 투표소에 줄을 섰으며, 야당이 압승하고, 참패한 여당에선 쇄신 바람이 불었다. 4대강 사업 기조에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불교계 환경운동의 상징인 수경 스님은 지난 5일 ‘문수 스님 소신공양 추모제’에서 호소했다. “이명박 대통령님,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눈도 깜짝하지 않으십니까? 강의 숨통을 자르면서, 온갖 생명을 짓밟은 것으로도 모자라 사람의 목숨까지 가져가고도 이토록 냉담하십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래서는 안 됩니다.”

월드컵 틈탄 4대강 강행 선언

이 대통령의 침묵은 계속됐다. 남아공월드컵이 막을 올리고 한국 대표팀이 첫 경기인 그리스전에서 2 대 0으로 쾌승을 거둘 때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승리의 달콤함에 빠져 있을 때, 그제서야 대통령은 입을 열었다. “4대강 살리기는 ‘생명’ 살리기 사업입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인천국제공항과 고속철도에 이르기까지 국책사업은 그때마다 많은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바로 그 사업들이 대한민국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습니다. 4대강 사업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가 몸을 불살라도, 민심이 투표를 통해 중단을 요구해도 4대강 사업을 강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대~한민국’의 분위기를 틈타 얼렁뚱땅 말이다.

‘대~한민국’의 뒤편에서 사람들은 계속 죽어가고 있다. 월드컵의 막이 오른 11일, 낙동강 유역에서 20여년째 골재 채취업을 해오던 70대 사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망한 것은 이틀 전이었다. 유서에는 “정부가 많은 국민이 반대하는 사업을 추진해서 원망스럽다. 생업을 못하게 돼 힘들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4대강 사업으로 골재 채취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데 대해 고민해왔다고 한다.

육체적으로 숨이 끊기는 것만이 죽음이랴. MBC는 총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인사위원회에 회부된 이근행 노조위원장의 해고를 확정했다. 역시 지난 11일, 월드컵 개막일이었다. MBC에서 노조 활동과 관련해 해고자가 나온 것은 1996년 총파업 당시 최문순 노조위원장(현 민주당 의원) 이후 14년 만이다. 민주노동당에 가입하거나 당비를 낸 혐의로 기소된 수백명의 전교조 교사와 전공노 공무원들도 파면·해임 등 ‘사회적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행정안전부는 지방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전국 시·도 교육청과 지방자치단체에 이들을 징계조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마도 월드컵이 끝나기 전 ‘대청소’를 완료하는 게 목표일 것이다. 

‘대~한민국’ 함성에 묻힌 죽음들

이어지는 죽음들, 대답 없는 권력에 질식했을까. 4대강 사업 반대에 앞장서던 수경 스님은 화계사 주지와 불교환경연대 대표직 등 모든 직함을 내놓고 조계종 승적까지 반납한 채 자취를 감췄다. 그는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에 큰 충격을 받고 자괴감을 느껴왔다고 한다.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는 경향신문 6월9일자 칼럼에서 “월드컵이 무섭다. 현 정부가 그간 미뤄둔 구린 일들을 싹 해치울까봐”라고 했다. 나는 월드컵이 아니라 내가 두렵다. 한국 대표팀이 고지대인 요하네스버그에 잘 적응할지, 세계 최고의 공격수 리오넬 메시를 막아낼 수 있을지, 부부젤라 소리에 경기력이 떨어지지는 않을지 궁금해하는 내가 두렵다. 그 사이 또 누군가 죽어갈까봐, 그것도 모른 채 TV 앞에서 넋을 잃고 있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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