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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여성 대법관을 허하라

opinionX 2010. 7. 6. 15:55
지난해 이맘때다. 미국에서 히스패닉계 최초이자 여성으로선 세번째인 연방대법관이 탄생했다. 소니아 소토마요르다. 1년이 지난 지금, 미국에선 네번째 여성 연방대법관이 탄생하려 하고 있다. 하버드대 로스쿨의 첫 여성 학장을 지낸 엘리나 케이건이다. 그가 인준되면 대법관 9명 중 여성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포함해 3명으로 늘어난다.

한국 대법원에도 여성 대법관이 있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4명 가운데 김영란·전수안 대법관 등 2명이다. 이 중 김 대법관이 8월24일 퇴임한다. 대법원은 지난달 말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어제까지 후임 대법관 후보자 추천을 받았다. 제청자문위는 오는 19일쯤 회의를 열어 후보군을 3~4명으로 압축해 대법원장에게 추천할 예정이다. 이후 대법원장은 이들 중 1명을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한다.
 



김영란 대법관 | 2010-07-25 | 경향신문 DB
 
 
대법관 임용 자격은 의외로 까다롭지 않다. 법원조직법에 따르면 40세 이상, 법조경력 15년 이상이면 된다. 반드시 판·검사 출신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변호사 자격증만 있다면, 국가기관이나 지자체 등에서 법률 관련 업무를 하거나 대학의 법학 교수(조교수 이상)로 재직한 기간이 15년 이상이면 대법관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규정에도 불구하고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이는 거의 모두 고위법관들이다. 자연히 성별은 절대 다수가 남성이다. 법원 내부에서는 법원의 안정성을 고려하면 이런 선택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대법원 구성 다양성’ 중요 의미

‘기수 파괴’ 인사에 대한 사법부 일부의 우려는 이해한다. 그러나 최소한 김영란 대법관의 후임을 서열 위주로 인선해서는 안 된다. 김 대법관을 기용한 것은 노무현 정부이지만, 그의 발탁이 갖는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라는 의미는 어떤 정부에서도 폄훼될 수 없다. 여성 대법관의 임용은 단순히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 대법관은 어린이, 노인, 노동자, 장애인, 외국인, 성적소수자 등 한국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를 대변할 수 있다. 여성은 소수자의 인식에 공감하는 촉수, 즉 일종의 ‘소수자 감수성’을 갖고 있는 까닭이다. 비슷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남녀 법조인이 있다 치자. 남성이 직선주로를 질주해왔다면, 여성은 끊임없이 허들을 넘으며 힘겹게 현재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높다. 그 허들은 가정·사회에서의 성차별일 수도 있고 출산, 육아, 가사노동의 부담일 수도 있다. 허들을 넘는 과정에서 ‘엘리트인 그녀’는 ‘약자인 그들, 그녀들’과 만났을 것이다.

김영란 대법관은 2006년 6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수에 선 사람들은 소수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수의 권익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고려해야 합니다. 판결하기 전에 한번 더 소수의 입장에서 생각해봅니다.” 

2006년 3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새만금 관련 소송에서 11 대 2로 공사 재개를 명령했다. 김영란 대법관은 박시환 대법관과 함께 “자연환경 보전의 가치가 개발에 따른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보호돼야 한다”는 반대의견(소수의견)을 냈다. 2007년 3월 ‘대학 시간강사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돼 대학이 산재보험료를 부담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김 대법관은 이 사건의 주심을 맡았다. 지난 5월 대법원은 “어린아이를 둔 부부가 이혼할 때 누가 양육에 적합한지 우열을 가릴 수 없다면 자녀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아버지가 성실하게 딸을 보살펴왔고, 딸은 부모가 헤어질 경우 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며 아이 의사에 반해 친권행사·양육자를 어머니로 지정한 원심을 파기, 환송했다. 이 사건의 주심도 김 대법관이었다.

어린이·노인 등 소수자 대변

1981년 무명의 애리조나주 판사이던 샌드라 데이 오코너를 미 연방대법관에 지명한 이는 공화당 소속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레이건은 법무부와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반대에 굴하지 않고 오코너의 인준을 밀어붙였다. 오코너는 미 연방대법원의 ‘균형추’ 역할을 하며 여성의 낙태 권리와 어퍼머티브 액션(소수자 우대정책)을 지켜냈다. 그가 알츠하이머를 앓는 남편을 간호하기 위해 사임하자,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정치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표현했다. 

‘보수 대통령’ 레이건은 훗날 ‘레이거노믹스’로 명명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기억되지만, 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을 임명한 대통령으로도 역사에 남았다. 한국의 보수 대통령도 여성과 소수자의 권익을 위해 행동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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