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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는 곳은 양쯔강 한복판이다. 충칭에서 배를 타고 3박4일 동안 동쪽으로 항해, 이창에서 내려 기차를 타고 충칭으로 돌아가는 크루즈 투어에 동참할 기회를 얻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강답게 가도가도 남북양면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풍경은 왜 동양에서 산수화가 발전했는지를 오롯이 깨닫게 해준다. 곳곳에 널린 유물과 유적들은 그 옛날 어떻게 이런 걸 짓고 만들었는지에 대한 불가사의한 의문을 던진다. 꽤 오래전 중국을 방문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이번 여행에서 얻고 있다.

처음 와본 충칭의 밤은 묘했다. 서울 한복판에 견주어 손색없는 고층 빌딩들이 즐비했지만 어둠의 밀도 또한 깊었다. 살짝 외곽으로만 빠져도 가로등이 없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빛나는 붉은 간판으로 들어가 화끈하고 얼얼한 쓰촨 요리를 먹는 것으로 충칭에서의 일정을 시작했다. 열대의 여름 속에서 자라난 나무들은 큼직하고 푸르렀다. 서울의 1980년대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들과 지금이 21세기 중국임을 웅변하는 빌딩들이 나란히 숲을 이뤘다. 도심을 누비는 사람들의 표정은 활기차되 여유로웠고 곳곳에 남아 있는 청대의 건물들이 대륙의 역사를 무심히 드러냈다. 시내를 빠져 나와 1만5000t급 크루즈를 탔다. 그 크기와 화려함에 놀랐다. 이 정도 크기는 아니지만 수백명이 탈 수 있는 거대한 배를 그렇게 어이없이 물에 잠기게 한 한국의 시스템에 다시 한번 화가 났다.

배에 올라 하룻밤을 지낸 지금, 가장 인상 깊은 건 도처에서 만나는 서비스 종사자들의 표정이다. 허름한 주점에서건, 화려한 호텔에서건 마찬가지다. 손님을 대하는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자연스럽다. 여행지에서 진상을 떠는 부류의 인간은 아닌지라, 그들의 화난 모습은 당연히 보지 못했다. 통하지 않는 말로 어떻게든 주문을 받으려고 할 때 느껴지는 당황스러운 표정, 크고 작은 실수를 했을 때 보이는 멋쩍은 웃음, 팁이라도 한 푼 주려니 손사래 칠 때의 단호함 등등. 고도의 서비스업 교육이 일반화된 한국에선 한동안 본 적 없는 풋풋함이 그네들에게 있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닌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스침을 그때마다 느꼈다. 다른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비해서 한국처럼 친절이 의무화된 나라는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게 아닌 당위로서의 친절 말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서비스업, 편의점의 한 풍경 (출처 : 경향DB)


서비스업에서 고객 응대 매뉴얼은 물론 필수다. 부드러운 대접을 받아 기분 나쁜 사람도 역시 없다. 그러나 비행기에서부터 편의점에 이르기까지 마주하는, 고객에 대한 과잉 친절이 마냥 편하지는 않다. 잘 훈련된 미소가 편안함을 주기는 하지만 역시 자연스럽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상대에게 존칭을 하는 것도 모자라 물건에 존칭을 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이 물건은 얼마십니다’ 말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훈련된 친절과 과도한 존칭은 그 정도의 선을 제시하지 않으면 자신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 단계 넘어가자면, 소비 과정에서의 ‘진상질’로 자기 위안을 삼고 스트레스를 풀 수 없을 만큼 일상에서의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는 어디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는 얘기와, 진상질을 하는 손님에게 화끈하게 보복했다는 얘기가 똑같은 공감을 얻으며 퍼져 나간다.

나는 이런 현상에서 한국 사회라는 공동체의 위기를 느낀다. 공동체란 계급이 아닌 역할의 유기체다. 서로가 평등한 관계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때 공동체는 유지된다. 역할과 직급보다 자신의 계급을 상대보다 위에 세우고자 할 때, 마침내 계급이 역할보다 우선시될 때 공동체는 수명을 다하고 붕괴되는 법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훈훈한 미담들은 대개 역할에 충실하되 계급을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진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때,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우리는 공동체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김작가 |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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