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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한두 번은 겪지 않았을까 싶다. 외국어로 길게 지어진 아파트 이름을 외우기 어려워 헤매는 일 말이다. 부모가 찾아오지 못하게 하느라 그런다는 우스갯소리가 참 씁쓸하다. 외국어로 이름을 지어야 좀 있어 보인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고, 공급자나 소비자가 서로 그런 생각을 부추긴다.

과자나 라면 등 식품의 이름을 포장지에 적을 때는 외국 문자나 한자가 한글보다 커서는 안된다는 규정이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정한 식품의 표시 기준이다. 이게 불필요한 규제라고 없애달라는 산업계의 민원을 규제개혁위원회(규개위)가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단다. 로마자나 한자로 포장지를 도배하든 말든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다.

먼저, 이들은 세계화 추세에 따라 다른 산업 분야에서는 영문 머리글자나 영문 제품명을 마구 사용하는데 식품산업은 표시 제한으로 다른 산업에 비해 영업과 마케팅 활동에서 제한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수출 경쟁력 문제나 업계 안의 불공정 문제가 아니라 자기네 일하기 불편하다는 불만이다. 혹시 식품산업에 대한 차별일까? 아니다. 난 이 규정이 식품산업이기에 필요하다고 본다. 먹는 걸로 장난치지 말라는 말이다. 한글과 같은 크기로 상품 이름에 외국 문자를 적을 수 있는데도, 이 규정을 없애자는 목적은 외국 문자를 크게 적고 한글은 보일 듯 말 듯 적어 외국 제품처럼 보이겠다는 것이리라. 앞서 말한 외국어 이름 아파트를 외국인 아파트로 오인할 일이야 없지만 과자나 사탕, 라면 등에서 이런 오해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종류가 많고 신제품도 쏟아지며 제조 단가도 싸기 때문이다.

우리 소비자기본법에서는 “국가는 소비자가 사업자와의 거래에 있어서 표시나 포장 등으로 인하여 물품 등을 잘못 선택하거나 사용하지 아니하도록” 상품명부터 여러 가지 정보의 표시 기준을 정하게 했다. 이런 마당에 정체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비겁한 위장술을 마케팅이라고 우기니 기업이 욕을 먹는 거다. 어린 시절 홀짝 내기로 껌종이 따먹기 할 때 외국 글자만 쓰여 있는 외국 껌은 제대로 읽을 수가 없어서 늘 환산 가치가 높았다. 아마도 이들은 로마자로 적은 상품을 내면서 가격을 더 올릴지도 모른다.

시중에 판매 중인 과자 '닥터유' (출처 : 경향DB)


둘째로, 이들은 국가경쟁력이 필요한 시점에서 활자 크기 제한은 경쟁력을 낮춰 식품 기업의 영업 활동에 규제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영업이익을 국가경쟁력과 동일시하는 이 오만함도 어처구니없고, 국내 시장에서 어떤 경쟁력을 낮춘다는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나에겐 식품 대기업이 외국 상품처럼 꾸며서 마구 광고 때리고 돈을 퍼부어 자기네 시장 점유율 높이고 싶은데, 그걸 막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난 그들이 애국기업이라서 자기네 이윤을 희생해왔다고는 절대 생각지 않는다. 비용이 조금 더 들어가고 있다면 그만큼 영업이익을 겨냥한 가격을 매겨 놓았을 게 뻔하다.

이들 식품 기업과 규개위는 식품 대기업의 이윤이 한글의 가치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몇몇 기업 배 불리자고 우리의 미래를 희생해야 하는가? 과자와 라면 등의 식품을 가장 많이 접하는 층은 어린이와 청소년, 젊은이들이다. 그들의 눈에 한글보다 로마자가 더 멋지고 돈 되고 우수한 글자라고, 우리 글자는 과자 이름 하나도 표기할 값어치가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자니. 굳이 경쟁력을 따진다면 정신의 힘을 버려야 할 까닭이 없다.

이 문제는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큼과 동시에 영어 능력을 잣대로 삼아 영어에 취약한 세대를 차별할 위험도 갖고 있다. 영어유치원 다니는 손자 앞에서 할머니가 과자를 찾지 못해 자신의 짧은 배움을 한탄해야 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국민의 보건과 안전,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 권리가 연결된 문제에서는 더 이상 천박해지지 말자.


이건범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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