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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촛불 아래 펼쳐보는 한 폭의 그림이 있다.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가 그것이다. 오랫동안 화집의 복제본으로만 감상했는데, 지난해 여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다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원본을 확인했다.

여기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아들은 누더기 옷에 거지꼴이고, 아버지는 움푹 팬 두 뺨에 백발이다. 아들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는 몸을 숙여 두 팔로 아들의 두 어깨를 감싸 안고 있다. 그림에는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화폭을 양분하자면, 왼편에는 재회하는 부자의 모습이, 오른편에는 이들을 지켜보는 증인들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촛불에 의지해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부분은 바스러질 듯 늙은 아버지의 얼굴과 그 앞에 꿇어앉은 아들의 두 발이다. 아들의 한쪽 발은 신발이 신겨져 있고, 다른 한쪽은 벗겨져 있다. 나는 이 장면에서 두 마음을 헤아려 본다. 아들은 먼 곳을 헤매다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 저 왔어요!’라고 외칠 수 없다. 문 밖에서 서성이다가 아버지의 모습과 마주치자 와락 달려들어 무릎 꿇는다. 그는 아버지의 상속을 챙겨 부모 형제로부터 멀리 떠났다가 방탕한 생활을 하며 모든 것을 날리고 빈털터리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오래전 집 떠난 아들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아왔다. 부랑아 같기도 하고, 죄수 같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남루한 모습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버지는 ‘아들아!’ 부르며 달려가 끌어안는다. 이들의 재회 장면을 그린 것이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이다. 서로를 향해 누가 먼저 달려갔는지 따지는 일은 부질없다. 아들의 참회도 아버지의 용서도 이심전심, 사랑 앞에서는 하나가 될 뿐이다.

매년 12월이면 함께하는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 옆에, 올해에는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산’을 펼쳐놓았다. 최근 영화의 전당에서 <나의 위대한 친구, 세잔>을 본 여파이다. 영화는 독학으로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바탕으로 화풍을 개척한 폴 세잔과 그의 친구 에밀 졸라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한 사람은 그림으로, 또 한 사람은 소설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세상의 부조리와 싸워 빛을 밝힌 우직한 존재들이다. 이들의 출발점은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면 렘브란트의 ‘탕아 돌아오다’를 만날 수 있듯이, 엑상프로방스에 가면 세잔의 아틀리에와 그의 지난한 고투의 현장인 ‘생트 빅투아르산’을 눈앞에서 경험할 수 있다.

미증유의 국정농단 사태 속에 가을도 겨울도 도둑맞았다. 도둑맞은 세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냉철한 판단과 인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빼앗긴 자존감을 회복해줄 지혜와 위로가 절실하다. 행복은 본능의 영역이다. 나 자신과 가족, 친구들을 위한 따뜻하고 강인한 이야기, ‘탕아 돌아오다’이든, ‘생트 빅투아르산’이든 사랑에 관한 긴 이야기가 간절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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