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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세 살의 카뮈는 ‘티파사에서의 결혼’에 이렇게 썼다.

“어떤 시간에는 햇빛 때문에 들판이 캄캄해진다.”

카뮈는 정오라는 시간을 문학사에 새롭게 등재시킨 작가로 통한다. 신들이 내려와 살았다던 지중해안의 고대 페허, 그 위에 내리는 정오의 햇빛, 폭발하는 색채의 꽃들, 꽃들이 뿜어내는 현기증 나는 향기들, 그리고 사방에 펼쳐진 짙푸른 하늘과 바다.

여기에서 정오란 시간적인 의미인 동시에 공간적인 의미로 읽어야 한다. 시공간적인 자연현상인 동시에 감각들의 혼융, 또는 결혼으로 읽어야 한다. 이어지는 다음 문장이 그것을 말해준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이란 속눈썹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알베르 카뮈, <결혼>, 김화영 옮김)

살아가면서 우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실내에 있다가 정오의 눈부신 햇빛 속으로 나아갈 때, 또는 영화관 로비의 환한 조명 아래에서 휘장을 제치고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 두 눈을 뜨고 앞을 보고 있지만 앞을 전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당황하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빛은 빛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눈앞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뮈가 쓴 저 한 문장은 인류가 끊임없이 반복해온 익숙한 한 문장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의 눈앞을 가려온 낡은 커튼을 시원하게 찢어버리는 칼날 같은 경구가 된다.

카뮈가 스물 세 살 때 쓴 “어떤 시간에는 햇빛 때문에 들판이 캄캄해진다”는 문장은 단편소설의 미학 원리인 현현(顯現·Epiphany·이피퍼니)과 맞닿아 있다. 이피퍼니는 프랑스처럼 가톨릭 국가에서 주현절(1월6일)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기리는 날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뜻하지 않게 마주치는 신성, 또는 찰나 속에 맞닥뜨리는 영원성을 뜻한다. 이것이 소설에 와서는, 어떤 복잡한 사태 앞에서 주인공이 겪는 극심한 갈등이 해소되는 지점, 혼란을 뚫고 본질과 마주치는 순간을 의미한다.

소설의 주인공 앞에는 언제나 쉽지 않은 길이 놓여 있게 마련이다. 주인공은 이런저런 함정과 우회로를 겪으며 나아가는데, 이때 주어지는 시련과 혼란의 강도에 따라 이피퍼니의 효과는 극대화된다. 혼란의 정점에서 보고야 마는 사태의 진실, 거기에 이피퍼니의 원리가 거울처럼 작동한다.

혁명과 사랑은 완성되는 순간, 변질되기 시작한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그러므로, 모든 것이 밝혀지는 순간에 깃드는 방심이다. 지난가을부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토요일마다 광장에 나가 탄핵안을 가결시킨 촛불집회가 끝이 아닌 시작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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