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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디에도 증세 없는 복지국가는 없다. 시민들은 노동을 통해 소득을 얻고, 누진적으로 세금을 내야 한다. 일하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으면서 공짜 복지를 바라는 시민들이 많은 나라는 복지국가가 될 수 없다. 선거에서 복지 확대 공약을 내놓으면서 증세를 거론하지 않는 것은 표만 얻고, 공약은 이행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서도 진보·보수 후보 가릴 것 없이 복지 공약을 쏟아냈다. 양극화·고령화·저출산 등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려면 복지 확대가 필수적이라는 데 공감대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재원 마련 대책없이 복지 공약을 내놓으면서 포퓰리즘 논란이 커지고 있다. 대선후보 5명이 내놓은 기초연금 인상 공약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2021년부터 월 30만원을,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소득 하위 50% 노인에게 30만원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모든 노인에게 월 30만원 지급을 약속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와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도 기초연금 인상 공약을 내놨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기초연금은 인상되는 것이다.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49.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4배에 달할 정도로 심각하다. 노인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기초연금을 올리자는 데 반대할 유권자는 거의 없다. 대선 후보들의 기초연금 지급 공약이 실현되려면 연간 20조원이 넘는 재정투입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재원 마련 방안으로 증세를 거론한 대선 후보는 없다. 세출 구조조정과 세입 확대, 탈루소득 발굴 등 원론적이고 모호한 재원 마련 방안을 밝혔을 뿐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4월 19일 (출처: 경향신문DB)

대선후보들이 내놓은 아동수당 공약도 마찬가지다. 문 후보는 0~5세, 심 후보는 0~11세, 유 후보는 초·중·고교생이 있는 모든 가구에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월 10만원의 아동수당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안 후보는 만 0~11세 자녀가 있는 소득 하위 80% 가구에 월 10만원, 홍 후보는 초·중·고교생 자녀를 둔 소득 하위 50% 가구에 월 15만원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아동수당은 전 세계 91개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복지제도다. 아동수당 지급에는 적게는 연 3조원, 많게는 15조원이 필요한데도 재원 마련 방안을 제시한 대선 후보는 없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 비중은 10.4%로 OECD 회원국 평균(21.6%)의 절반 수준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득에 비해 세금을 적게 내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의 조세부담률은 GDP의 19.4%다. OECD 회원국 평균(25%)에 비해 GDP의 6%포인트가량인 93조원의 세금을 덜 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저부담-저복지’의 복지 후진국에서 벗어나려면 증세를 통한 ‘적정부담-적정복지’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복지 확대를 위한 증세는 소득세·법인세·상속세 등 직접세의 누진세율을 올리는 것이 효율적이다. ‘증세 없는 복지확대’라는 헛구호에 매달렸던 박근혜 정부처럼 담뱃세 등 간접세를 올리는 방식의 우회 증세는 조세정의를 해치고, 소득재분배를 악화시킬 뿐이다. 심상정 후보가 제안한 ‘사회복지세’ 신설도 검토해볼 만하다. 사회복지세는 소득세·법인세·상속세 등을 부과할 때 납부액의 일정 비율(10~20%)을 따로 걷는 세금이다. 심 후보는 사회복지세로 22조원의 복지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복지는 세금을 먹고 자라는 나무와 같다. 복지 공약을 내놓으면서 증세를 거론하지 않는 것은 물과 거름을 주지 않고 나무를 키우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선 과정은 복지 확대를 위해서는 시민들이 번 만큼 세금을 내야 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시민도 정치인도 준비되지 않은 채 복지 확대를 바라고 그게 가능한 것처럼 말하고 기대하는 것은 서로를 속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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