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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 피해자의 행동방식이 다양할 수 있는 만큼 ‘피해자라면 취해야 할 행위’를 일반화·유형화할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2부는 강제추행·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등 혐의로 기소된 모 갤러리 대표 ㄱ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이같이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강제추행 혐의를 무죄로 본 원심을 깨고 ㄱ씨에게 징역 8월을 선고한 뒤 법정구속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가 피해자 김지은씨의 피해 전후 행동을 근거로 김씨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과 대비된다.

성폭행 등의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4일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서울 마포구 서부지법 청사를 빠져나가고있다. 이준헌 기자

ㄱ씨 사건의 1심 재판부는 피해자 ㄴ씨가 추행 후 즉각 항의하지 않았고 ㄱ씨와 헤어진 뒤 “조심히 들어가세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점을 무죄 근거로 들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그러나 “피해자 진술이 일관되는 경우 객관적으로 신빙성이 없다고 볼 만한 자료가 없는 한 (피해자 진술을) 함부로 배척해선 안된다”는 대법원 판례를 언급했다. 또 “피고인의 사회적 지위, 피해자가 겪을지 모를 불이익 등을 고려해보면 추행 이후 ㄴ씨가 항의하지 않았다는 태도는 피고인의 행동이 추행에 해당하는지와 관련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문자메시지 발송과 관련해서도 “성범죄 피해자의 행동방식은 피해 당시 상황이나 피해자의 처지, 피고인과의 관계, 피해자의 성격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며 진술의 신빙성을 깎아내릴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봤다.

수원지법 평택지원에서도 유사한 판결이 나왔다. 지난달 말 평택지원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혐의로 기소된 조기흥 전 평택대 총장에게 징역 8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조 전 총장은 성추행 사실이 없으며 설사 있었다 해도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추행당한 뒤 타인에게 피고인을 칭찬한 사실이 있지만, 이는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고통을 떨치기 위해 정상적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애쓴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서울중앙지법과 평택지원의 두 판결은 ‘피해자다움’이라는 신화를 배격하고, 권력형 성범죄를 제재하려는 입법 취지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안 전 지사 사건 항소심을 맡게 될 재판부도 왜곡된 통념이나 가치판단에서 탈피해 법과 증거에 따라 엄정한 심리를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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