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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를 이용해 비서에게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서부지법은 14일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 등으로 기소된 안 전 지사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모든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와 비서 김지은씨가 상호 지위상 위력관계인 점은 인정하면서도, 안 전 지사가 위력을 행사해 간음을 했다는 증명은 부족하다고 봤다. 위력관계는 있었으나 위력 행사는 없었다니 납득하기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피해자다움’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무죄 근거로 삼은 점이다. 재판부는 지난해 7월 러시아 출장 당시의 첫 간음 행위와 관련해 김씨 진술의 신빙성이 낮다면서, 간음 이후 김씨 행동을 근거로 들었다. “피해 당일 저녁에 피고인과 와인바에 간 점” “귀국 후 피고인이 머리를 했던 헤어숍에 찾아가 같은 미용사에게 머리 손질을 받은 점” 등이다. 이는 성폭력 여부를 판단할 때 ‘피해자는 이래야 한다’고 요구하는 왜곡된 시선을 반영하고 있다. 피해자가 사건 이후 정상적 생활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폭력을 당하지 않았다’고 볼 근거는 되지 못한다. 재판부는 김씨가 당장 사표 내고 귀국 비행기를 탔어야 ‘진짜 피해자’로 받아들일 건가. 재판부의 판단은 성범죄 소송에서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을 강조한 지난 4월의 대법원 판결과도 배치된다.
재판부는 또 김씨를 두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성적 주체성을 갖춘 사람은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형법 303조는 ‘업무, 고용, 기타 관계로 인해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해 위력으로 간음한 경우’ 범죄가 성립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보호 또는 감독은 받지만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을 배제한다면,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의 피해자는 미성년자와 장애인 등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권력형 성범죄를 제재하려는 입법 취지는 사라지고 해당 조항은 사실상 사문화된다.
이번 판결로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이 위축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미투는 인권운동이자 변혁운동으로 윤리적 정당성을 공인받은 터다. 피해자의 침묵은 강요될 수 없다. 억압에 저항하는 이는 보호받고 격려받아야 한다. 안희정 사건은 항소심에서 보다 정교한 판단이 이뤄지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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