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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임신중단·임신중지)한 여성과 수술한 의사를 처벌하도록 규정한 형법 조항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1953년 형법 제정과 함께 낙태가 범죄로 규정된 지 66년 만이다. 헌재는 11일 형법 제269조 1항(자기낙태죄) 및 제270조 1항(의사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했다. 재판관 9명 중 4명이 헌법불합치, 3명이 단순 위헌, 2명이 합헌 의견을 내놨다. 국회는 2020년 12월31일까지 관련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 이 기한 안에 개정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해당 조항은 무효화된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 생명권을 존중하고 확장시킨 헌재 결정을 환영한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다. 이번 결정은 국가가 여성의 몸을 자의적으로 통제하고, 그 통제를 거부하는 여성에게 가혹한 책임을 물어온 과거와 결별하고 여성인권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의미가 있다. 헌재는 기존 낙태죄 조항이 임신 초기를 포함한 전 기간에 걸쳐 모든 낙태를 일률적·전면적으로 금지함으로써 인간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모자보건법에서 제한적으로 낙태가 허용되는 경우를 규정하고는 있지만 ‘다양하고 광범위한 사회적·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 갈등 상황’은 전혀 반영되지 않아 여성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11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선 하루 종일 찬반을 주장하는 기자회견과 시위가 이어졌다. 낙태죄를 반대해온 시민단체 회원들이 형법 제정 이후 66년 만의 헌법불합치 선고 소식을 듣고 환호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이제 공은 국회와 정부로 넘어갔다. 헌재 결정의 취지를 존중해 형법의 해당 조항을 삭제하거나 개정하고 관련법인 모자보건법도 손질해야 한다. 헌재가 제시한 기한이 1년8개월 이상 남았다고 하나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선 서두르는 게 바람직하다. 일각에서는 낙태가 폭넓게 허용될 경우 무분별한 낙태가 늘어날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낙태를 보장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다수 회원국은 한국보다 낙태 경험 비율이 높지 않다. 가임기 여성 1000명당 인공임신중절 건수를 의미하는 인공임신중절률은 독일 7.2, 캐나다 12.1(이상 2012년 기준), 노르웨이 12, 프랑스 15(이상 2015년 기준) 등이다. 한국은 15.8(2010년 기준)로 이들 나라보다 높다.

후속 입법 과정에서 임신중절권의 허용범위와 시기, 사유 등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란이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하나하나 모두 중요한 쟁점이지만, 논의가 이 부분에만 매몰될 경우 여성의 자기결정권에 기반한 헌재 결정의 의미는 축소될 우려가 있다. 여성의 선택과 결정을 위한 ‘자격’을 또다시 국가가 심사하는 차원으로 후퇴해선 곤란하다. 국가가 시민의 신체와 관련해 할 일은 ‘처벌’도 ‘승낙’도 아니다. 국가의 역할은 낙태나 출산과 관련해 여성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고 안전한 보건·의료서비스를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헌재 결정은 인권과 생명에 대한 시각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단순히 낙태의 비범죄화를 넘어 ‘재생산권’에 대한 사회적 모색이 필요하다. 재생산권은 아기를 낳지 않을 권리뿐 아니라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권리도 포괄한다. 혼인 여부, 장애, 성적 지향 등에 따라 아기를 낳거나 키우고 싶어도 배제되는 이들이 있다. 더 많은 시민이 정당한 재생산권을 보장받고, 태어난 아이가 차별 없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사회 구조와 인식의 개선으로까지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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