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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전격적으로 임기 내 개헌 추진 의사를 밝혔다. 박 대통령은 “1987년 개정돼 30년간 시행되어온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 헌법은 과거 민주화 시대에는 적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됐다”며 “정략적 목적이 아닌 대한민국의 50년, 100년 미래를 이끌어 나갈 미래지향적인 2017년 체제 헌법을 국민과 함께 만들어 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부 내에 개헌 조직을 즉각 설치하겠다고 실행 계획까지 밝힌 뒤 국회에도 조속히 개헌특위를 구성할 것을 촉구했다.

김재원 대통령 정무수석도 브리핑을 갖고 “국회 논의과정을 봐가면서 필요하다면 대통령께서 헌법개정안 제안권자로서 정부안을 제안할 수 있다”며 “향후 개헌 일정에 대해선 대통령이 주도한다는 입장”이라고 부연했다. 다음 대통령 선거를 1년 남짓 앞둔 시점에서 박 대통령이 느닷없이 제의한 개헌 논의로 정치권은 물론 온 나라가 요동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정운영과 예산편성에 관한 시정연설을 하는 가운데 김종훈 의원(울산 동구)이 '#나와라_최순실' 피켓을 들고 있다. 권호욱 선임기자 biggun@kyunghyang.com

박 대통령의 개헌 추진은 그 내용과 방법, 시기 등에서 모두 부적절하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지금까지 ‘민생경제의 어려움’과 ‘엄중한 국제 정세’를 강조하며 현시점에 개헌을 추진하면 모든 현안이 블랙홀처럼 빠져든다고 주장했다. 이런 박 대통령이 시민과 정치권이 원하고 있다며 하루아침에 입장을 바꾼 것은 충격적인 표변이다. 국가의 100년 미래를 이끌 헌법을 만들자고 하면서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꾸고 자신의 임기 내 개헌을 하겠다는 것이 과연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옳은 태도인지 되묻고 싶다.

박 대통령은 또 1987년 헌법 체제가 지금과는 맞지 않는다며 5년 단임제의 폐해 등 권력구조 개편에 대해서만 집중 언급했다. 기본권 강화나 87년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의제들은 외면했다. 외교·안보 정책이 정권에 따라 바뀐 것이 마치 단임제의 폐해인 양 언급하며 자신의 실책을 덮는 무책임함까지 보였다. 박 대통령이 직접 개헌을 주도하겠다면서도 어느 쪽으로 끌고 갈지 밝히지 않아 개헌 방향을 가늠할 수도 없다. 개헌은 정치권의 이해관계, 권력자의 의도를 떠나 주권자인 시민이 참여하고 주도해야 한다. 개헌은 시민의 뜻을 모으는 것이 우선이다.

2007년 1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4년 중임제 개헌을 제안했을 때 야당의 대선후보였던 박 대통령은 “민생경제를 포함해 국정이 총체적인 위기에 빠져있는데, 대통령 눈에는 선거밖에 안 보이느냐”며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쌍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때 박 대통령은 “대선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개헌 논의를 하면 블랙홀처럼 모든 문제가 빨려 들어갈 수 있다”며 “대선후보가 확정되면 개헌안을 만들어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받은 뒤 개헌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도 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말을 잘 되새겨야 한다. 그리고 그때는 왜 그런 주장을 했고, 지금은 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지 밝혀야 한다. 만일 과거 발언을 취소할 생각이면 사과부터 해야 할 것이다.

박 대통령의 개헌 주장은 시기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차기 대선판과 야당을 흔들기 위한 정략적 이익의 차원에서 접근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개헌 제안에 야권의 반응이 엇갈리는 것처럼 야권 내 개헌 찬성 세력과 반대 세력을 갈라놓을 분열책으로 개헌 카드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여권 내 반박근혜 기류를 잠재우는 한편 다음 대선의 성격까지 변질시켜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암수도 드러난다. 개헌 정국은 새누리당 집권 10년에 대한 평가와 박근혜 정권의 실정에 대한 심판론을 뒷전으로 밀어낼 것이 분명하다. 가뜩이나 대선판이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운데 30년 만에 개헌 정국까지 겹치면 정치가 극도의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박 대통령은 지금 ‘비선 실세’ 최순실씨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등 권력형 비리 의혹으로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몰려 있다. 이 시점에서의 개헌 제안은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다목적 카드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은 어제 나라가 최순실 게이트로 들끓고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개헌 추진을 공식화했다. 자신만이 옳다는 그릇된 자기 확신에서 나온 독선의 결과다. 말로는 시민과 나라를 위한다지만 권력의 화신을 보는 듯하다. 박 대통령은 개헌 논의에서 물러서 국정 운영에 전념하는 게 옳다.

여당이 쌍수를 들어 반기고 야권의 일부도 개헌 찬성 입장을 밝혔다. 당분간 정치권을 중심으로 개헌 논의에 불이 붙을 것이다. 여야간 개헌에 속도가 붙지 않으면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 개헌을 주도하겠다는 뜻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개헌에 관한 국민적 합의 가능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개헌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논의할 국가 중대사이다. 박 대통령의 정략적 계산의 결과라는 의심이 거두어지지 않는 한 시민은 개헌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국가에서 시민의 뜻을 이기는 존재는 없다. 시민이 원하지 않는 개헌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 박 대통령이 이를 하루속히 깨닫고 남은 임기 동안 개헌이 아니라 국정파행을 정상화하는 데 전념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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