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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이 백남기 농민의 사망원인을 ‘병사(病死)’에서 ‘외인사(外因死)’로 수정했다. 고인이 병이 아니라 외부 요인에 의해 사망했다는 의미다. 당연한 결정이지만 9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사필귀정이라고 평가하고 넘기기엔 한국 최고의 의료 전문가 집단인 서울대병원에 그동안 속수무책으로 당한 고인과 유족들의 피해가 너무나 크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고인은 2015년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뒤 의식을 잃고 317일 동안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고통을 겪다 지난해 9월 사망했다. 그러나 주치의였던 백선하 교수(신경외과)는 전공의에게 사망원인을 ‘병사’로 기록하게 했다. 감기 환자가 승용차에 치여 죽었는데 사망원인이 감기라는 식이다. 경찰이 물대포를 쐈고, 고인이 맞아 쓰러졌고, 뇌출혈까지 일어나 한번도 깨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일련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경찰은 한발 더 나아가 백 교수의 병사 판정을 근거로 고인의 부검까지 시도하는 무리수마저 두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시신을 지킨 수천명의 시민들과, 서울대병원 교수들의 각성을 촉구한 의대 학생들과 동문 의사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경찰과 정권은 고인의 사망 원인을 지병 탓으로 조작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제 다음 순서는 진상규명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고인을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밝혀야 한다. 강신명 당시 경찰청장은 사과나 반성은커녕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으면서 임기를 마쳤다. 시민단체가 강 청장 등 경찰 관계자들을 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고발했지만 검찰 수사는 1년반이 넘도록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고인의 사망원인이 병사로 둔갑하게 된 과정도 조사해야 한다. 서울대병원이 고인의 사인을 정정한 것은 다행이지만 이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지금이라도 서창석 원장과 백 교수는 유족과 시민에게 사죄하고, 사인을 왜 병사로 판단했는지 전말을 상세히 밝혀야 한다. 병원 수뇌부는 백남기 농민 사건 처리 과정에서 경찰은 물론이고 청와대와도 수시로 접촉한 정황이 드러난 바 있다. 백 교수가 왜 이렇게 무리한 결정을 했는지, 서 원장이 압력을 행사했는지 등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진상규명,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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