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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그제 의회주의를 부정하는 폭언을 하면서 은연중 드러낸 것이 있다. 자신만이 시민을 대의하며, 정당·국회의원은 자신의 지시를 충실히 따라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정치가 정부의 정책이 잘될 수 있도록, 국회가 견인차 역할을 해서 국민들이 잘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함에도 정부와 정책에 갈등·반목·비판만을 거듭”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과 정부는 시민의 의사를 완전하게 반영하는 절대선이므로 정당, 국회, 의원이 대통령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기만 하면 그게 곧 시민을 위한 정치가 된다는 논리다.

이건 억지다. 현대 정치는 정당정치다. 정당은 시민의 의사를 조직하고 반영하며 정책을 생산한다. 의원 역시 시민을 대표한다. 그 의원들로 구성된 국회는 시민을 대표하는 가장 권위있는 제도로서 시민을 대신해서 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견제한다. 대통령만이 시민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체제가 있지만 우리는 그런 체제를 흔히 독재라고 부른다.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여당 역시 대통령의 도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여당 의원도 대통령의 부하가 아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여당 의원은 물론 여당 지도부조차 자기 수족처럼 부려먹을 수 있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자신이 선거를 지휘하면서 당선시켜주었는데 그 은혜를 모르고 배신하고 신뢰를 저버렸다고 경멸적 언어로 비난하는 방식은 조직폭력 세계의 정서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배신자는 다음 총선에서 떨어뜨릴 것임을 암시하며 심판론을 제기하는 그의 복수심에 국정이 파탄날까 걱정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개정 국회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시사하는 등 현안과 관련된 발언을 하고 있다(오른쪽).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을 둘러싼 참석자들의 비판을 들으며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왼쪽)._경향DB


이렇게 심각한 지경이면 청와대 참모들이나 집권당은 그가 하루빨리 냉정을 되찾도록 조언하고 제 방향으로 가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런데 반대로 하고 있다. 국회법 개정안을 폐기하기로 한 당 지도부가 대통령에게 충성 맹세까지 한 것이다. 김무성 당 대표는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대통령에게 사과하라고 종용했고, 유 원내대표는 두 번이나 사과를 했다. 마치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초등생이 선생님에게 용서를 비는 모양이다. 도대체 당 지도부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런 굴욕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야당과의 이견 때문에 대화를 했고, 그 결과 합의를 도출했을 뿐이다. 그게 잘못이라면 이제는 대통령을 위해 야당과 전쟁하는 것밖에 없다. 앞으로 야당을 거부하고 일당 독주하겠으니 자신들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고 치자. 그래서 대통령이 용서해주기로 하면 정치는 정상화되는 것인가. 국정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있는 집권당이다. 박 대통령의 폭주를 막을 세력은 집권당뿐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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