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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3월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 1만5000여명이 뉴욕의 럿거스광장에 모여들었다.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이들은 10시간 노동제를 요구했다.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외쳤다. 이날의 함성을 기리는 뜻에서 3월8일이 ‘세계여성의날’로 정해졌다. 그날의 외침은 지금도 유효하다. 여성들의 연대는 공고하던 남성 기득권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한국 사회의 젠더 격차는 심각하다. 지난해 말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세계 성 격차 지수’에서 한국은 149개국 중 115위에 그쳤다. 성별 임금 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부동의 1위다. 여성의 평균 임금은 남성의 63.2%에 불과하다. 출산·육아로 인한 불이익, 승진에서의 ‘유리천장’은 여전하고 여성 노동자가 많은 돌봄·가사 노동은 정당한 가치를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들불처럼 번진 미투 운동은 성차별이 야기한 폭력과 억압, 착취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제 여성들은 더 이상 참지 않겠다며 거리로 나선다. 이들의 분노와 용기는 조금씩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항소심 재판부는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한 판결을 통해 권력형 성폭력에 경종을 울렸다. 서울시는 ‘성평등 임금공시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입법 측면에서의 변화는 더디다. 미투 운동 이후 관련 법안들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대다수가 처리되지 못한 채 계류 중이다. 이는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17%로 OECD 최하위 수준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여성의 정치대표성 확대를 통해 법·제도적 개혁을 앞당겨야 한다.

최근 20대 남성의 대통령 지지율 하락을 두고 ‘젠더 갈등’을 거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정치(精緻)한 해석으로 보기 어렵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며 좋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이전 세대 남성들이 누리던 지배적 남성성을 향유하기 어려워진 데서 온 박탈감을 원인으로 지적한다.

배우 에마 왓슨은 2014년 유엔에서 ‘HeForShe’ 캠페인을 시작하며 연설했다. “성평등은 바로 당신(남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남성들이 성공에 대한 왜곡된 인식 때문에 취약해지고 불안정해지는 것을 봤다. 남성이 지배할 필요가 없다면 여성은 지배당하지 않아도 된다. 남성과 여성 둘 다 마음놓고 감성적이거나 마음놓고 강해질 수 있어야 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우월주의가 아니며, 평등과 연대를 여성의 언어로 말하는 신념이다. 111주년 세계여성의날이 여성과 남성 모두 한 걸음씩 더 자유로워지는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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