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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전 검사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이후 ‘미투(MeToo)’ 물결이 거세다. 그러나 지난해 미투 캠페인이 활발했던 미국과 다른 점이 눈에 띈다. 피해자가 공개적으로 나설 때도 가해자의 실명을 폭로하는 일은 흔치 않다. 가해자의 실명을 고발할 때는 피해자가 익명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인들의 익명 앱 ‘블라인드’에 올라온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승무원들에게 부적절한 신체접촉을 해왔다’는 글이 대표적이다.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으로부터 성추행 피해를 제기한 서지현 검사가 4일 밤 서울 송파구 동부지검에 설치된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회복 조사단’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며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한국의 법체계는 거짓은 물론 ‘사실’을 공개한 데 따른 명예훼손죄도 인정한다. 형법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한 경우 2년 이하 징역·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정보통신망법의 벌칙은 더 세다.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이다.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폭로에 앞장섰던 탁수정씨는 경향신문에 “우리는 열악한 성폭력법을 가진 나라에 산다. 가해자들은 법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이기 때문에 법으로 걸고 넘어진다”고 말했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를 겪었던 이은의 변호사는 “성폭력 고소에 맞고소하는 ‘가해자 시장’이 늘었다”(한국일보 인터뷰)고 비판했다.

명예훼손죄 고소·고발이 남용되면 내부고발 등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우려가 크다. 이 때문에 영미권에서는 명예훼손을 형사처벌하는 경우가 거의 없고, 대부분 민사소송으로 해결하도록 한다. 한국과 같은 대륙법체계인 독일도 내용이 허위일 때만 처벌한다.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는 2011년 “명예훼손의 비형사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권고한 바 있다. 2016년 서울지방변호사회 설문조사에서도 응답한 변호사의 49.9%가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폐지에 찬성했고, 16.5%는 유지하더라도 징역형은 삭제하자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2016년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를 없애는 내용의 형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강자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는 약자인 피해자에게 수사·재판의 부담까지 안기는 족쇄 노릇을 한다. 8년 만에 용기 내 폭로한 서 검사도 “(안 전 검사장이나 최교일 의원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 위헌법률심판 소송으로 다퉈볼 생각”(JTBC 인터뷰)이라며 역고소를 각오하는 상황이다. 피해자의 ‘말할 자유’를 막는 명예훼손죄, 반드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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