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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를 이기는 방법은 내가 먼저 공포를 만들면 된다.” 일본만화 <드래곤 헤드>에 나오는 대사다.

친구들과 열차여행 중 대지진 때문에 땅속 암흑천지에 갇히게 된 중학생들은 극도의 공포에 빠진다. 그런데 그중 무서움에 떨던 한 학생이 스스로 유령이 되어 암흑에 갇힌 친구들에게 원인 모를 공포를 만들며 공포를 이겨낸다.

2012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더킹 투하츠>에도 이런 부분이 있다. 북한 특수부대 여자 장교와 천방지축 안하무인 남한 왕자가 서로에 대한 편견과 세상의 불신, 방해를 딛고 사랑을 키워간다는 휴먼멜로 드라마인데, 남과 북의 대화국면마다 등장하는 기업이 있다. ‘다국적 군산복합체 지주회사 클럽M’의 회장 존 마이어(한국명 김봉구)는 남과 북의 협상국면마다 자신의 기업이 진행해야 할 프로젝트의 이권이 축소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매번 화해무드를 반전시키려 갖가지 음모로 공포를 조장한다. 마치 자신에 의해 남과 북의 공포가 만들어지면 그것이 본인의 막대한 이권으로 유지되는 상황, 즉 공포를 자신이 먼저 만들면 통제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이 극대화됨을 보여준 드라마의 가상적 상황이었다.

요즘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남과 북의 대화가 시작되는 영역은 스포츠와 문화다. 개회식과 폐회식의 단일팀과 한반도기,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북한 예술단의 남한공연 등이 현실화되며,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평양올림픽’ ‘북의 갑질’ ‘올림픽을 체제 선전장으로 만들려는 시도’ ‘어렵게 출전하게 된 남한 선수들의 출전기회를 축소시키는 공정하지 못한 굴욕적 협상’ 등 북한을 화두로 한 프레임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호기심과 의구심을 넘어 불안과 분노의 요소를 덧붙여 새로운 형식의 공포를 2030세대까지 소환해 확대시키려는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은 편향적인 상상일까?

물론 올림픽 개회식 전날 기존 날짜까지 갑자기 바꿔가며 세계를 향해 열병식을 예고하고, 합의했던 일정을 한밤중에 갑자기 취소하는 등 북한의 속보이는 유치함과 옹졸함에 대해 필자도 답답하고 화가 난다.

그러나 그들만의 관점에서 편파적으로 보면 세계로부터 고립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려는 필사의 몸부림으로 보인다. 북한이 느끼는 실재적인 공포를 스스로 무시하는 척하며 반전시키려는 배수진의 전략임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북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전략 또한 보다 진화되고 섬세하며 정교해질 필요가 있는데도 여전히 기존의 프레임을 반복하는 시도들 역시 답답하다. 정치의 대안성이 문화의 상상력을 여전히 뛰어넘지 못한다.

문제는 공포가 아니라 자신감 있는 이해를 통해 자존감을 지켜주는 신뢰의 대화다. 필자는 2002년 <게으른 고양이 딩가>라는 애니메이션 남북공동제작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기 위해 제작진과 함께 북한 평양을 4박5일간 방문했었다. 중국 베이징을 거쳐 평양순안공항에 도착했던 당시의 경험은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다. 환영만찬과 환송만찬 등 보통강호텔에서 근사하게 우리에게 마련해준 북한의 성의가 모두 우리 측 기업의 비용으로 처리되었다는 후문을 듣고, 북한은 참 어렵지만 자신의 입장만큼은 세워보려고 부당한 억지를 부리고 있구나 생각했다.

협상 때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고, 말도 안되는 계약조건을 요구했다. 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계약에는 갑과 을이 있는데, 지금 남측이 갑이다. 그런데 왜 을이 되는 북측이 갑질을 하려고 하느냐?” 그때 북한의 협상대표격 고위간부가 이렇게 답을 했다. “돈 많이 벌고 성공한 형이 형편이 어려운 동생 돕는데 갑과 을이 어디 있습네까?” 어이가 없었지만 역지사지해보면 이해도 되어 쓴웃음만 나왔다.

여유 없는 공포를 만드는 습관에 중독된 우리는 아닐까? 언제쯤 우리는 여유로운 자신감으로 그들을 역지사지하며 이해해주고, 옹졸함과 유치함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지적하며 질타할 수 있는 성공한 형으로서의 자세를 보여줄 수 있을까? 자라나는 우리의 자녀들을 보면 북한의 같은 세대보다 자유롭고, 영특하며, 재주도 많고, 자신의 주장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키도 더 크다.

그들에게 자랑스럽게 용기를 내라고, 우리가 이미 이겼음을 그리고 더 잘해낼 수 있음을 전제하고, 폭넓은 자신감으로 이해하며 설득하라고 얘기해줘도 될 때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느낌, 공포는 여전히 후진적이며 유치하다.

<한창완 세종대 교수 만화애니메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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