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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지난 4월 국회에 제출한 추가경정예산안(추경안)이 24일 현재 91일째 묶여 있다. 역대 계류 기록을 보면 2000년(107일), 2008년(91일)에 이어 세번째였지만, 이제 2위 기록을 갈아 치웠다. 이대로라면 추경안 계류 역대 최장 기록을 세울 판이다. 추경은 예산 투입의 적기를 놓치면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1950~1953년 한국전쟁 당시 2대 국회는 대구·부산으로 옮겨 다니면서도 9차례 추경안을 처리해 집행한 바 있다. 전시(戰時) 피란 국회에서도 처리했던 추경안이 지금은 여야의 극한대치로 심사조차 제대로 못한 채 방치돼 있다. 여의도에선 헌정 사상 처음으로 추경안이 무산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그동안 국회에서 별별 꼴을 다 봤지만 산불과 지진 피해 이재민을 도울 목적으로 편성된 긴급예산안이 묵히고 묵히다 폐기 전망까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국회가 이렇게 된 데는 일차적으로 자유한국당에 책임이 있다. 한국당은 추경안 처리 조건으로 패스트트랙 철회와 사과, 경제실정 청문회, 북한 목선 사건 국정조사, 정치개혁특위·사법개혁특위 위원장 교체, 국방장관 해임안 등을 내걸며 발목을 잡았다. 속된 말로 표현하면, 추경을 볼모로 이참에 한밑천 잡자는 얄팍한 상술(商術)과 무엇이 다른가. 나경원 원내대표는 23일 연구·개발 업종에 대한 주 52시간 근무제 제외, 선택적 근로시간제 확대 등 또 다른 조건을 추가로 내걸었다. 추경안(6조7000억원) 규모는 올해 예산 469조원의 1.4%에 불과하다. 여기에 온갖 정치 현안을 갖다 붙여 압박하니 누가 보더라도 과도한 정치공세로밖에 비치지 않는 것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역시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지금은 경기 불황에 일본의 보복공세가 이어지는 비상한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전날 여당 원내대표단과 오찬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드릴 수 있도록 정치권은 협치로 뒷받침해야 할 것”이라고 추경안 처리를 거듭 당부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정치력을 발휘해 야당의 협조를 얻어내기는커녕 야당에 맞서 똑같이 싸움만 벌이고 있다. 6월 임시국회 종료일인 지난 19일 이후 여야 원내대표들은 물밑 접촉마저 중단했다고 한다. 국정운영을 책임진 여당이 ‘야당 탓’만 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이제는 추경안을 둘러싸고 각종 진기록 수립을 목전에 두고 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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