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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에서 권력형 의혹이나 국기문란 사건이 터지면 ‘대처 문법’이 있다. 관련 의혹이나 의문을 제기한 언론이나 야당 등을 ‘법적 조치’로 위협하고, ‘정치검찰’의 물타기 수사로 물꼬를 돌리고, 곁가지를 끄집어내 본질을 호도하고, 의혹이 사실로 확인돼 궁지에 몰리면 “개인적 일탈 행위”로 몰아 꼬리자르기에 골몰하는 식이다. 국정원과 군 사이버사령부의 대선개입 사건을 필두로 채동욱 전 검찰총장 뒷조사 등 청와대가 개입된 사건에서 특히 그랬다. 박근혜 정권의 ‘비선 실세’로 거론되어온 정윤회씨가 국정에 개입했다는 내용이 담긴 청와대 문건이 공개되자, 당황한 청와대와 여당이 예의 ‘본말전도’ ‘책임 떠넘기기’ ‘꼬리자르기’ 수법을 총동원하고 있다.

당장 ‘청와대 문건’의 작성 경위·내용에 대해선 아무런 조사나 설명 없이 “찌라시 수준”이라고 일축하면서, 애써 ‘문건 유출’만을 부각시킨다. 공직기강비서관의 지시로 정윤회씨 감찰을 벌여 보고서를 작정한 박모 전 행정관의 문건 유출 의혹과 기강 문제로 초점을 돌리려는 적반하장이다. 새누리당은 연일 청와대 문건을 “허구와 상상에 기인한 소설”로 단정하며, ‘문서 유출’ 엄단만을 촉구하고 있다. 대놓고 검찰 수사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꼴이다.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으로 ‘문서 유출’을 따지려면, 공식 직책이 없는 정씨에게 정기적으로 대통령과 청와대 동향 등을 유출했다는 청와대 인사들의 중대 범죄 여부부터 조사해 규명해야 한다. 청와대도 존재를 시인한 ‘공식 보고서’를 입수해 보도한 언론사를 ‘명예 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 것도 실체 추적을 옥죄려는 치졸한 대응일 따름이다.

새정치민주연합 박범계 비선실세 국정농단진상조사단장이 30일 국회 정론관에서 '정윤회씨의 국정개입 의혹'과 '청와대 문건 유출' 등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분명코 본질은 “라면박스 2개 분량의 청와대 문건” 유출 여부가 아니다. 왕조시대의 ‘환관권력’을 연상케 하는 비선 측근들의 국정농단 내용이 담긴 청와대 보고서가 작성되었고,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정식 보고된 사실이다. 국정에 개입한 구체적 행위와 정황이 적시되었음에도 면밀한 조사나 조치 없이 “풍설”로 치부해 없던 일로 덮은 경위다. 외려 보고서를 올린 공직기강비서관실의 비서관과 행정관이 인사조치되는, ‘권력 암투’의 잔영이 강렬하다. 본디 ‘공식’이 아닌 ‘비선’ 권력을 둘러싼 의혹은 감추려 들수록 눈덩이처럼 커지고 안으로 곪기 마련이다. 청와대는 속히 보고서 작성 경위, 김기춘 비서실장과 박 대통령에 대한 보고 내용, 사후 조치 등에 대해 낱낱이 밝혀야 한다. 최종적으론 정윤회씨와 청와대 ‘문고리 권력 3인방’ 등 이른바 ‘십상시’들의 국정농단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명명백백히 규명되어야 할 터이다. 그리고 ‘비선 측근’이란 의혹 자체가 곧장 대통령에게 연결되는 만큼 이번 파문에 대한 박 대통령의 책임 있는 입장표명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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