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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왔다고 떡을 돌리는 풍습이 급격하게 사라져 간다. 떡은커녕 앞집의 문을 두드리고 ‘신고’를 하는 일도 별로 없다. 아파트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옆이나 위아래로 붙어 사는 집인데도 어쩌다가 마주쳤을 때 싸늘하게 외면하기 일쑤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나는 이웃과 우연히 마주치면 먼저 인사를 건네곤 한다. 이에 반갑게 화답하는 분도 있지만, 마지못해 최소한의 답례만 하는 분이 더 많다. 어색한 표정으로 살짝만 반응하고 곧바로 눈길을 돌려버리는 경우도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 인간관계가 희박해지고,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는 더욱 냉랭한 기운이 감도는 세태가 일상에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장면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 쉽게 말문이 트이는 것을 본다. 공원이나 산책길에서 반려견을 데리고 다니는 행인들이 많은데, 강아지들 사이에 갑작스러운 상호작용이 흔히 일어난다. 동물적인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이기에, 주인들은 별로 제재하지 않는다. 대개 잠깐 멈춰 서서 그들의 어울림을 지켜본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된다. 상대방의 강아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오가고, 외모와 행동에 대한 품평도 곁들인다. 그 분위기는 사뭇 화기애애하다.

가까이 사는 이웃도 아닌데 그렇듯 스스럼없이 소통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전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누군가가 아기를 데리고 있으면 옆에 있던 사람들이 눈을 맞추고 방긋 웃어주면서 그 보호자에게 나이를 묻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아닐까 싶다. 강아지와 아기의 공통점이 있다면, 연약하다는 것 그리고 순수하다는 것이리라. 여리고 티 없는 생명체를 매개로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그 순간 에고는 홀연히 사라진다. 자기도 모르게 어린아이가 되어 대상에 온전히 몰입하고, 타인에 대한 경계 태세도 해제해버린다.


관심사가 비슷하다고 해서 늘 그렇게 이음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보물이나 명품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예쁜 목걸이를 차고 있거나 비싸 보이는 가방을 들고 있는 이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아, 멋지네요. 얼마짜리예요?”라고 물어본다면 기겁하면서 자리를 피할 것이다. 고급 등산복이나 승용차 등도 마찬가지다. 가격을 기준으로 하는 위세 경쟁에 은근히 신경을 쓸지언정 타인들끼리 공통의 화제로 삼지는 않는 것이다. 소유물과 자기를 동일시하고 그것으로 서로를 구별 짓기 하는 상황에서는 부질없는 긴장에 갇혀버리게 된다.




강아지나 아기도 자신의 지위나 재력을 과시하기 위해 데리고 다닌다면 그런 굴레에 얽매일 것이다. 대개는 그렇지 않기에, 그 존재들을 응시하며 아집의 속박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허세를 부리거나 자기를 방어하지 않고 스스로를 무심하게 드러내게 되는 계기는 그 외에도 많다. 2002년 월드컵 축제 같은 이벤트도 그중 하나다. 모두의 기쁨이 되는 결정적 장면에 가슴을 터뜨리면서 일순간 하나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예술 공연도 마찬가지다. 고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탁월한 경지에 다 함께 초대되어 심미적 감동으로 녹아들 때, 나와 너 사이의 분별이 사라진다.

그런가 하면 ‘결핍’이 의외의 연결고리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여럿이 함께 지내는 병실에서 환자나 보호자들은 옆 사람들과 금방 말문을 튼다. 서로의 어려움에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쉽게 공감하고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는다. 건강의 부족이 관계를 맺어주는 공통분모가 되는 것이다. 큰 재난을 당하여 생겨나는 아픔과 상처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새삼스럽게 연결해주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다. 또한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허물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감추고 싶은 그늘을 넌지시 내보일 때, 각별한 신뢰와 친밀감이 생긴다. 헝가리의 속담 하나를 인용하자면 ‘누구도 자기의 그늘 속에 들어가서 쉴 수는 없다. 내 그늘에는 다른 사람만이 와서 쉴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이어주는 또 하나의 통로는 바로 자연이다. 담장이나 대문에 걸어놓은 꽃바구니가 골목의 표정을 바꿔주고, 한 평 공원이나 텃밭을 함께 가꾸면서 주민들이 새로운 얼굴로 만난다. 봄꽃의 절경이나 단풍의 장관에 경탄하면서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타인들 곁에 서게 된다. 비좁은 자기를 넘어서는 위대한 그 무엇을 만날 때, 반사적인 경계(警戒)와 관습적인 경계(境界)를 풀어헤친다.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 한 구절은 그 정곡을 찌른다. ‘꽃그늘 아래 생판 남인 사람 아무도 없네.’


김찬호 | 성공회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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