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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글날, 사흘간의 연휴를 맞아 아들과 아버지가 암자를 찾아왔다.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온 부자는, 이번 여행의 콘셉트가 느릿느릿 시간의 여유를 느끼며 감성을 충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길로 가볍게 산행을 다녀온 부자는 손수 밥을 안치고 된장찌개를 끓여 도토리묵과 갓김치로 저녁을 먹었다. 설거지를 마친 뒤에는 장작불을 지핀 따듯한 방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내 책을 펴들었다. 나란히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는 부자의 모습을 나는 밤이 깊도록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몇 년 전 어느 정당의 대선 경선 후보가 내세운 구호가 생각난다. 아마 ‘저녁이 있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 말을 듣고 크게 감탄했다.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그 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구호에서 나는 성장과 소비의 악순환이 만들어내는,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만드는 시대의 그물망을 읽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온 가족이 모여 앉은 저녁식탁의 풍경이 떠올랐다. 우리가 잊고 있던 소박한 행복을.

우리에게 행복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행복은 거창하거나 멀리 있지 않다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돈 많이 벌고 호화로운 집을 소유하고 명품을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고 한다. 남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슴으로 느껴야 진짜 행복임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행복은 일생에 몇 개 안되는 큰 사건과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작은 일에서 느끼는 기쁨들이 행복지수를 높인다. 식구들이 아프지 않고 화목하게 서로 사랑하는 것,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듣는 것, 책을 읽고 사색하고 성찰하는 것, 아이와 함께 꽃을 가꾸고 운동하는 것, 허물없는 친구들과 사소한 화제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 가끔은 심심해하며 게으름을 즐기는 것…. 이런 소소한 일들을 온전히 누릴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음만 내면 얻을 수 있는 이런 행복들이 침범당하고 있다. 사회 조직과 시스템 안에서 성장과 성과를 내기 위해 속도를 올리고, 권력과 돈을 목적으로 한 인간관계의 끈을 잇기 위해 ‘저녁이 있는 삶’을 빼앗기고 있다. 남보다 빠르게 성과를 내야 하는 ‘속도’, 자본과 권력의 끈을 맺기 위한 ‘접대’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밤과 주말이라는 시간에 이뤄진다는 것이다.


시간을 빼앗기면 공간을 빼앗기는 것이다. 공간을 빼앗기는 것은 개인과 가족의 삶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집은 웃음과 대화가 넘치는 화목한 가정이 아니라 각자 피곤한 몸을 눕히고 출퇴근하는 숙소로 바뀐다. 물질의 총량을 멈출 줄 모르는 사회구조가 개인 시간의 절대 빈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우리들 개개인이 쓸 수 있는, 써야만 하는 저녁과 주말의 ‘시간’은 소중한 사유재산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유재산을 허락 없이 무단으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빼앗는 행위는 탈법과 반칙이다.

개인의 시간을 앗아가는 일을 산중에서도 간간이 보게 된다. 서울의 높으신 분들이 휴가차 산사나 근처 민박집에 머물면 공무원이나 기업 지사의 직원들이 업무시간에 찾아와 인사하고 접대하느라 바쁘다. 높으신 분 때문에 아랫사람들은 제 할 일을 못하고, 개인적으로 누려야 할 시간마저 무단 침범당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밤 늦게까지 회식과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다. 공적 지위를 이용한 무언의 위압, 실적을 위한 경쟁, 관계 맺기와 줄을 대기 위한 술자리로 소시민들의 간과 위가 시달리고 있다. 우리 시대의 슬픈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는 인간의 시간을 사들이는 회색신사가 등장한다. 회색신사는 매사 불만에 가득 찬 이발사 푸지씨를 찾아가 이렇게 유혹한다.


“선생님 시간을 아끼세요. 예컨대 일을 더 빨리 하시고, 불필요한 부분은 모두 생략하세요. 지금까지 손님 한 사람당 30분이 걸렸다면 이제 15분으로 줄이세요. 나이 드신 어머니 곁에서 보내는 시간도 단축할 수 있어요. 값싼 양로원으로 보내면 되지요. 그리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앵무새는 내다버리세요. 무엇보다도 노래하고, 책을 읽고, 소위 친구들을 만나느라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과연 우리 시대의 회색신사는 누구인가. 그리고 묻는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하는 그것들을 쓸모 있게 쓸 수 있는, 그리하여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시간의 회복’을 위해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삶의 시선과 발길을 두어야 하는가. 개개인 삶의 새판을 짜기 위해 우리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첫 매듭을 시간의 회복, 소소한 행복에 두면 어떨까.


법인 스님 | 대흥사 일지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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