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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열아홉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만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 사람이 있었다. 사람을 개 패듯 패고 다녔다. 망치라는 별명은 장터와 뒷골목을 휩쓸던 주먹의 우악스러움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랬던 그가 훗날 나환자들의 정다운 아버지가 되었다. 어찌 된 일일까? “형은 사람 패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어린 동생이 툭 던진 이 한마디에 마음을 돌이켰다고 한다. 행실은 모질었어도 가슴 깊은 곳에는 여리고 부드러운 무엇이 살아 있었나 보다.

억센 손이라도 가만히 만져보면 따뜻하다. 밖에서는 몰라도 집에서는 틀림없이 누군가를 어루만지는 살가운 손이다. 통합진보당 해산부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까지 무엇이나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주먹에도 분명코 붉은 피는 돌 테다. 이 모든 게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한 충정이니 놀라지 말고 의심도 걱정도 말라 한다.

하지만 불안하고 무섭다. 노사정이 합의한 노동개혁안이라고 했다. 정부와 여당은 옥동자의 탄생처럼 반겼다. 이로써 막혔던 취업시장에 숨통이 트였고 경기활성화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며 나팔을 불었다. 놀랍게도 시중의 반응은 담담했다. 해고는 멋대로, 임금은 맘대로, 비정규직은 고무줄처럼 쭉쭉 늘리겠다는 데도 잠잠했다.

노동계의 반대도 들끓다 말았다. 민란이라도 일어나야 할 판인데 대한민국이 어째 이상하다. 주먹의 위선에 질리고 주먹의 위력에 기겁했는지 모른다. 아니면 너희들 하는 짓이 오죽하겠느냐, 일단 갈 데까지 가봐라, 계산은 잠시 미루자는 심정일까. 그렇다면 덫인가? 대중의 묵묵부답에 불안해졌는지 집권자는 아예 전쟁을 선포해버렸다. 어디 대들 테면 대들어 보라는 식으로 말이다.


국론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오직 단 하나의 역사가 필요하다. 어서 아이들의 교과서에서 악마의 발톱을 뽑아내자고 안달을 부린다만 그게 미래 세대의 눈동자에 바늘 하나를 찔러 넣는 무서운 짓임을 누가 모르랴. 공장이 조용해지는 주말에도 교육부 시계는 째깍째깍 부지런히 돈다. 국정화의 숙원은 착착 진행되고 있다. 내후년에는 이상한 한국사가 불쑥 얼굴을 내밀 것이다.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양반들은 좋기도 하겠다.

그런데 그러고 사는 게 정말 좋을까? 하지만 세상의 맛이라는 것이 지나고 보면 그때뿐이다. 더군다나 대통령 일인의 하명으로 개시된 영업인데 지금의 문전성시가 가면 얼마나 가랴. 서리 한 번 내리고 나면 우수수 지고 만다. 오늘이 마침 상강이다. 반면 스스로 떨치고 일어난 돌들의 외침은 삭풍이 분다고 사그라지는 법이 없으니 다 이긴 싸움이라도 부디 조심할지어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아주 작다. 맹자의 말이다. “새나 짐승과 다른 점은 아주 작다. (아주 작은 것을) 여느 사람들은 버렸는데 참사람은 간직한다(人之所以異於禽獸者 幾希 庶民去之 君子存之).”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이 금수보다 못한 짐승이다. 오죽했으면 개만도 못하다고 하겠는가. 사람의 사람됨은 어디에다 힘을 쓰느냐에 달렸다. 힘을 표현하는 아주 오래된 말이 있다. 바로 정(精)이다. 쌀(米)을 먹어서 얻는 푸른(靑) 기운이 정이다. 성경에 귀한 임을 사랑하려면 마음, 목숨, 뜻을 다해야 한다고 나온다. 이 세 가지가 바로 값지게 써야 할 ‘정’의 대표들이다.

한편, ‘정’은 순전히 남에게 빚져서 얻은 것이다. 스스로 달리는 기관차가 없듯이 ‘정’은 그 누군가를 태워야만 구할 수 있는 기운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정’은 누구에게 바칠 ‘정’인가? 신과 합일하여 신에게 드려야 한다. 그래야 정신(精神)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신이 예수의 임이나 석가의 임이 아니라도 좋다.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든 궁극적인 뿌리라고 알아들으면 족하다.

내 ‘정’을 바칠 ‘신’이 어디에 있는지 묻고 다닐 필요도 없다. 인류의 경전들은 공통적으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하늘과 동일시하고 있다. 추원보본 그리고 남에게 되돌려준다는 자세로 쓰기만 하면 ‘정’은 언제나 정신으로 승화된다. 물론 저와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쏟으면 부질없는 정력(精力)으로 변질되고 만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상을 받았다. 몸 지탱하자면 어쩔 수 없다지만 남의 생명을 불러다 치르는 번제이니 죄스럽고 황송하다. 덧없는 정을 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 차리기 위한 약으로 삼겠노라며 수저를 든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뿌려서 내가 거둔 알곡이라도 입에 넣을 명분이 없다.

철없을 때는 사람 패던 주먹이었다가 어린 동생이 내려치는 죽비 한 대에 번쩍 정신이 들고 나서부터 평생 남의 더러움을 닦아주는 손이 된 사람. 그는 광주 사람, 오방 최흥종 목사(1880~1966)다.


김인국 | 옥천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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