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시골집에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30촉이 되지 않았을 백열전구 하나가 집 안을 밝혔는데, 환하다는 느낌보다는 낯설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낮에도 잘 보이지 않던 천장 한구석의 거미줄까지 보였다. 적나라한 것의 불편함을 그때 알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전구가 자주 나가는 것이었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를 흔들면 끊어진 은색 필라멘트가 파르르 떨곤 했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하랄트 벨처의 <저항안내서>(원성철 옮김, 오롯 펴냄)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미국의 작은 도시 리버모어의 한 소방서에서 매년 한 전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전구의 생일? 그 전구는 1901년 소켓에 끼워진 이래 지금까지 불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1970년대 시골집 전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달포 전에도 아이들 방 형광등을 갈아 끼웠다. 그런데 백년 넘게 장수하는 전구가 있다니.

전구의 수명은 반영구적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필라멘트가 끊어지는 이유는 기업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1924년 전구 생산업체들이 전구 수명을 1천 시간으로 제한하기로 담합했다는 것이다. 반영구적 전구는 수요를 발생시키지 않고 결국 기업이 문을 닫게 만든다. 소비가 지속적으로 이뤄지지 않아 이윤이 발생하지 않으면 생산이 불가능한 체제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다. 그런데 전구 생산업체만 제품 수명을 조절해온 것일까.

며칠 전, 안경점에 들렀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20년 넘은 안경테에 렌즈를 갈아 끼우고, 안경을 새로 하나 맞추려는 참이었다. 주머니에서 오래된 안경테를 꺼내 놓았더니 안경점 주인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일본의 안경 장인이 손으로 직접 만든 명품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인 찬사가 아니었다. “안경테를 이렇게 튼튼하게 만들면 우리는 망합니다.” 엄살이 아니었다. 한창 잘나가던 국산 안경 브랜드가 시장에서 물러난 적이 있다. 이유는 단 하나. 안경테를 너무 튼튼하게 만들어 구매자들이 안경을 새로 교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후화 기술’이 있다. 지난 세기 초반, 미국 전구 생산업체처럼 제품의 수명을 일부러 단축시키는 기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고장이 나도록 해, 새 제품을 구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시장 논리의 입장에서 보면 노후화 기술은 전문기술이자 첨단기술이 아닐 수 없다. 어디 전구와 안경뿐이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제품에 노후화 기술이 내장되어 있을 것이다. 이제 오래 써서 못 쓰는 제품은 많지 않다. 닳고 닳을 때까지 사용하는 소비자도 별로 없다. 여전히 소비는 미덕이고 소비 능력이 삶의 질을 좌우한다.

광고 또한 탁월한 노후화 전략이다. 광고에 현혹된 소비자는 멀쩡한 제품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한 소비자가 동일한 광고 영상(CF)에 일곱 번 이상 노출되면 그 광고를 신뢰하게 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교육, 의료, 관광, 문화예술 분야에도 상품 수명을 단축하는 전략과 기술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의 ‘새것 콤플렉스’가 지식과 정보를 포함한 상품의 소비를 부추기는 원동력일 것이다. 최신 노후화 프로그램을 우리가 자발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형국이다.

만일 지구 자원이 무한하다면 노후화 기술은 환영받아 마땅한 신기술이다. 끊임없이 이윤을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구 자원이 결코 무한하지 않다는 데 있다. 화석 연료를 비롯한 모든 자원이 유한하다. 반드시 고갈된다. 전구 수명을 짧게 하면 단기적으로는 기업에 이윤을 가져다줄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자멸, 공멸하는 것이다. 제품 수명의 단축은 소비 증가로 이어지고, 소비 증가는 자원 고갈과 폐기물의 증가로 이어진다. 소비량이 늘어나는 만큼 공멸의 시기가 빨리 다가온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 대량 폐기를 엔진으로 하는 시장 전체주의가 지구 자원, 인류의 미래를 앗아가고 있다.

길은 있다. 필라멘트가 반영구적이듯 우리의 꿈도 무한하다. 시장 전체주의가 미래에 대한 ‘생각의 수명’을 제한했을 뿐이다. 시장의 근시안적 소비 전략 너머에 지금과 다른 세상이 있다. 스스로 질문하기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출발점이다. 스님들이 공양을 할 때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오셨는가’라고 묻듯이, 우리도 자문하고 자답하자. 이 스마트폰은 어디서 왔는가. 이 커피, 이 치킨, 이 자동차는 어디서, 어떻게 왔는가. 질문은 더 있다. 내가 버린 제품들은 다 어디로 가는가. 이 같은 문답이 모여 지금과 다른 세상을 기획하고 실천할 것이다.


이문재 |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