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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가 깊은 악순환의 구조에 빠진 게 아닌가 싶다. 집권당과 반정부연합 사이, 진보와 보수 사이에 갈등과 적대는 격렬한데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는 점점 줄어드는 현상이 그것이다. 이런 구조에서 가장 피해를 보고 있는 정치세력은 진보파다. 정치가 이성적 기반 없이 무작정 양극화로 치달을 때 힘이 약한 진보정당의 후보들은 선택의 범위에서 쉽게 제외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악순환 구조를 만드는 데 진보파 역시 기여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사태를 보수나 집권세력 탓으로 단순화하고, 즉자적으로 화만 내고 내용 없이 주장만 앞서다보니 비판적 판단을 가진 유권자조차 피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정치운동단체인 ‘진보의 합창’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11.04.02. | 경향신문 DB
 
금년 초 총학생회 선거가 한창인 어느 대학에 갔을 때 “100% 비운동권 후보”라는 홍보 현수막을 보았다. 운동권이 아닌 총학생회장의 출현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듣던 일이었지만, 운동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앞세우는 것이 득표에 도움이 되는 상황까지 된 것 같아 생각이 복잡했다. 한 모임에서 만난 대학생들에게 그런 사실을 말하면서 운동권에 대한 인식이 정말로 그렇게 나쁜지, 나쁘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된 지 꽤 되었으며 대체로 운동권이란 자기 확신이 과도해서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고 소통되지 않는 자신들만의 언어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정형화된 집단으로 보고 있었다. 

성실함보다 주장 앞세워서야

며칠 전 후배 교수로부터도 유사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친교 모임에 진보적 사회운동을 하는 한 사람이 우연히 참석했는데,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면서 다른 일들에 대해서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자세를 보였단다. 후배는 자신조차도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점점 불편해진다고 말했다. 필자가 보기에 운동권이나 진보 쪽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심리적 결함 가운데 하나는 강한 이념지향성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잘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이견을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소한 차이를 사소하게 다루지 못해 다투고 나서는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중대 사안에 대한 것일수록 이성적인 대화나 토론은 적다. 그보다는 윤리적 강요나 일방적 진영 논리가 더 압도적이다. 따라서 논란은 주장의 강도가 센 사람들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목소리가 낮은 사람들은 참여에서 배제된다. 기록을 남기는 것을 경시하고 잘못된 판단이 가져온 결과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보는 것을 힘들어하니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할 때가 많다. 조직의 체계나 규율은 약하고 개개인의 자유의지가 과도하게 부각되기도 한다. 그런 사람이 생계 때문이라며 사기업에 취직한 뒤에는 자신이 다니는 기업조직의 일사불란함을 격찬하는 경우가 있어 놀랄 때가 있다.

어느 틈엔가 진보 안에서 자조적인 분위기가 소리 없이 확산되고 있는데, 최근 이들로부터 본래 자신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에 가까운 사람이라거나 자기도 운동권 싫어한다는 황당한 말을 자주 듣는다. 아마도 운동권이나 진보의 이미지가 나빠지고 있는 것에 대한 개개인의 무의식적 반응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은데,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아닌가 싶다. 

친근한 인간적 매력 느껴지게

그렇다면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주체적 사고의 기초 위에서 말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적었다는 것인데, 그런데도 격렬한 갈등이 여전히 담론시장을 압도한다 할 때 그 격렬함이 담고 있는 진실이 뭔지 회의하게 된다. 성실함보다 주장을 앞세우지는 않았는지, 상대를 욕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다 했다고 한 적은 없는지 돌아봤으면 좋겠고, 누구나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인간적 매력이 느껴지는 진보가 될 수 있는 길을 넓히는 노력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런 노력 없이 진보가 잘 된다면 그것 역시 진보적인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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