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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그날, 바다>를 개봉 당일 관람했다. 과학적 관점으로 배의 출항에서 침몰까지의 시간대를 추적해 침몰 원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진실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판단하고, 가열차게 탐구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낸 김지영, 김어준 이하 제작진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침몰한 지 4년, 배를 건져낸 지도 1년의 시간이 흘러버려 더 이상 밝혀낼 것이 없다고 다들 포기하는 심정이 되었는데 이 영화는 남아 있는 증거와 증언을 바탕으로 ‘침몰 원인’에 집중함으로써 진실의 강력한 조각을 극적으로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영화라기보다는 검찰에 제출할 증거자료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영화의 핵심은 AIS(Auto Identification System)의 항적기록이 조작됐다는 사실과 조작되기 전 원래의 기록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드러내는 데 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탄식을 금치 못했다. 거짓말쯤은 밥 먹듯이 하는 이명박근혜 정부였다는 걸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증거를 조작하고 거짓으로 일관한 것인가 싶어 큰 충격을 받았다.
생떼 같은 아이들이 300명이나 죽든 말든, 가슴 아파하는 유족과 국민이 진상을 알고 싶어하든 말든 ‘덮어야 한다’는 일념에 하나부터 열까지 체계적으로 조작하고, 거짓 위에 거짓을 쌓는다면, 이와 같은 일은 대체 어떤 종류의 범죄에 속하는 것일까.
거짓투성이가 민관 합동의 객관적 보고서가 되고, 전문가들의 결론이 되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음모론이 되는 기막힌 사태는 세월호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천안함도 마찬가지다. 천안함은 북한의 어뢰 공격에 따른 폭침이라는 게 정부의 결론이다. 하지만 폭발에 의한 격침이었으면 마땅히 있어야 할 화약 냄새, 이비인후과적 손상, 폭발음, 수중 폭발에 따른 물기둥, 물고기들의 떼죽음, 고열, 화염 등 어떤 것도 관찰되지 않았다.
파괴된 배에서 눈으로 관찰된 것은 외부 물체와의 충돌 흔적이다. 배가 첫 좌초 이후 표류할 때 또 다른 잠수함이 들이받아 사고를 낸 후 도주했다는 정황 증거가 조사단에 의해 증거로 제출되어 있다. 그런데도 북한의 소행이라는 선언은 회수되지 않고 재조사는 이뤄지지 않는다. 오직 관심은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에만 있다.
이제는 정말 세월호와 천안함에 대하여 과학적인 재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이를 그냥 두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사회적, 경제적 비용을 초래할 것이다. 이미 나온 증거만 상식적으로 귀납해도 큰 윤곽은 그려진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그것을 덮으려고 했던 이들을 잡아내고 법적 책임을 지우는 일이다. 이는 내부 양심선언의 도움 없이는 쉽지 않다.
왜 이렇게 국민이 쉽게 보일까, 속여먹기 좋은 호구로 보일까. ‘바보’가 되어버린 듯하여 괴롭다. 우리 사회는 지금 공인에 대하여 거의 가혹할 정도의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뻔뻔스러울 정도의 거짓말, 말 바꾸기가 횡행하고 있다. 여전히 진실이 잠겨 있는 세월호와 천안함 사태, 국가를 이용해 조 단위의 자원사기극을 벌인 것으로 의심되는 전임 대통령,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의 재벌 2세의 폭언 등.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성’이 아니라 ‘최소한의 양심’이다.
그들에게 최소한의 양심을 요구하기 위해 사회 전체가 ‘도덕적 완벽함’으로 무장해야 하는 것일까.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번 금감원장 사태에서도 그렇듯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이들, 더욱 하자가 많은 이들이 주도가 되어 하자 운운하며 목에 핏대를 올리고 있다. 어떻게 도덕의 도자도 모르는 이들이 도덕을 손에 쥐고 무기로 휘두르도록 놔둘 수밖에 없는가.
양심, 진정성, 도덕성 이런 말들은 당분간 의식에서 지워버리고 싶다. 그래야 덜 괴로울 것 같다. 그 대신 ‘참’과 ‘거짓’을 걸러내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우는 사회 시스템을 위한 공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싶다. 거짓은 드러낼 수 있고, 입장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거짓은 거짓일 뿐이다. 이렇게 명확한 것을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로 삼자는 것이다. 법적 처벌을 강화하든, 헌법을 개정할 때 공직자의 거짓말에 대한 처벌 규정을 넣든, 거짓의 종류를 세분화하여 모든 행위에서 하나의 검열 장치로 작동하도록 하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고 상상력을 동원하고 총의를 모았으면 한다. 너무 심한 거짓말에 당하고도 당했나보다 넘기게 되는 그런 사회가 되게 내버려두지 말자.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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