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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산책자]과학에 꽂힌 여자

opinionX 2017. 10. 30. 14:25

“과학 전문 브랜드를 만들 거야!”

어느 날 갑자기 편집장이 말했다. 그러면서 작명한 타이틀까지 들고 오는 것이 아닌가. 뜬금없이 과학 브랜드라기에 좀 놀랐다. 지난 10년간 글항아리 이름으로 많은 책을 내면서 과학책도 조금씩 펴내긴 냈다. <청소년을 위한 과학 고전 읽기> <정치사회 현상을 읽는 창으로서의 물리학> <시인이 읽어주는 물리학 원리> <생물학을 둘러싼 전쟁> 등 주로 인문학과 접촉면을 갖고 과학을 흘금거리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두 권씩 내는 것과 전문 브랜드를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내는 것은 차원이 다른데 어쩌려고 저러는 걸까? 한다면 하는 성격이니 할 것 같긴 한데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로 편집장은 우리 출판사 창업 동지이자 나랑 같이 사는 사이다. 그런데 어떤 주제나 분야에 대해 주도적으로 ‘출판’을 해보겠다고 선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상황을 좀 더 알아보니 이렇게 된 것이었다. 먼저 영향을 미친 사람이 세 명 있었다.    

온라인 북클럽을 운영하고 있는 대표님이 첫 번째다. 그는 “글항아리는 역사 분야에만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역사는 과거를 다루잖아요. 저는 미래에 더 관심이 많은데….” 대략 왜 과학책을 내지 않느냐는 이런 뜻인데, 그가 흘린 말꼬리가 그녀를 자극했다. 다른 한 명은 조선시대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다. 인(仁)이라든지 심(心)이라든지 하는 용어들과 씨름하는 게 그의 일인데, 뜻밖에도 그는 최근 과학책을 읽는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인문학 특히 철학으로는 한계를 느낀다”는 게 이유였다. 마지막 한 분은 출판사 대표다. 그는 한 자리에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문학엔 별로 관심이 없어. 크게 매력을 못 느끼겠거든.” 문학에 한창 빠져 있던 그녀는 과학책에 좀 더 초점을 두는 그로부터 제법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출판사 대표님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소설책을 한 권 선물하기도 했다.

이렇게 밑밥이 뿌려진 상태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생겼다. <경계에 선 생명(Life on the Edge)>이라는 책의 번역원고를 맡아서 교정을 보게 된 것이었다. 이 책은 분자 단위가 아닌 양자 단위에서 벌어지는 생명 현상을 연구하는 ‘양자생물학’을 대중적으로 풀어낸 ‘과학교양서’다. 3년 전 에이전시 직원이 소개했고 좋은 책이라고 판단해 계약했다. 번역이 끝난 상태에서 묵혀두다가 더 늦으면 안 되겠다 싶어 교정을 보기 시작한 건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용어들이 낯설고 개념 장악이 안 되니 문장마다 미끄러져 넘어졌다. 지적 호기심이 강하고 성격도 급한 사람은 이럴 때 초조함과 좌절감을 느끼게 마련이리라. 이렇게 만학(晩學)이 시작되었다.

그 뒤로 약 한 달간 우리 집 서가에 새롭게 입주한 과학책들이 100권은 족히 되지 않을까 한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책이 거실을 돌아다녔다. 책 좀 그만 사라고 잔소리도 했다. 그랬더니 아주 대형 사고를 쳤다. 그녀가 최신 과학책 트렌드를 읽고 좋은 책을 찾아오겠다며 편집부 직원 한 명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으로 출장을 떠난 다음 날이었다. 혼자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인터넷 서점에서 배달된 책 박스 일곱 덩이가 현관문을 막고 있었다. 아, 이 스펙터클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낑낑대며 박스를 나르기 전에 사진을 찍어뒀다.

왜 도서관이라는 좋은 제도를 이용하지 않느냐고!

정말 놀라운 건 이 책들을 ‘실제로’ 읽는다는 것이다. 용어 정리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그렇게 끝없이 과학의 광활한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 헌책방에 가서 고등학교 때 보던 수학책까지 사와서 공부하는 걸 보고 나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출판이라는 게 이처럼 자연스러운 내재적 동력에 의해 그 지평을 넓혀가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으냐고 말이다.

사실 나도 지난 몇 년간 과학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건 아니다. 특히 국내에서 나온 논문들을 간간이 읽곤 했는데 태양열 전지의 기술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현장의 이야기들을 읽는 와중에 맥박이 뛰는 게 느껴지기도 했다. 과학책 시장이 좁다고 하지만 인문학보다 좁으랴. 그래, 한번 해보자. 사실 남모르게 계약해둔 책들도 좀 있다. 그것들만 순차적으로 펴내도 1년치는 될 것이다. 그동안 공부 열심히 하거라.

한편, 브랜드명으로 ‘글항아리’의 작법 원리를 따라 ‘사이언스항아리’는 어떠냐고 제안했다가 무참히 잘렸다. 새로운 브랜드명은 아마 ‘글항아리 사이언스’가 될 것 같다.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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