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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안 읽기 시작하면 책과 끝내 가까워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종종 책에 눈이 간다. 이것이 독서의 관성이고 책의 사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드거 앨런 포는 “책을 많이 읽을수록 독서력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다. 독서광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한눈으로 여러 대목을 살피며 읽어내고 요점만 잘도 골라낸다. 이에 따라 필요한 대목을 스스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주체적이고 실용적인 독서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책을 가까이하면 그런 능력이 자연히 는다는 말이겠다.

책 읽기를 강조해도 독서율이 빈한한 현실에서 정부가 제3차 독서문화진흥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2019~2023년에 공공기금으로 지역의 독서에 대한 관심과 독서 활동을 확장한다는 계획이다. 눈에 띄는 것은 개인 차원이던 독서가 겹쳐 읽고 공유하는 사회적 독서로 넓어졌다는 점, 무엇을 읽었는가보다는 어떻게 읽었는가가 화두라는 점을 주목했다는 것이다. 작년에 29개 지방자치단체가 참여해 발족한 ‘책읽는도시협의회’의 활동에 관심이 가는 것도 그러한 독서 방식 변화에 대응하는 공공기관의 지원이 늘었기 때문이다. 다만 독서 동아리는 늘고 있는데 독서율은 왜 떨어질까, 책이 소외되지 않게 하는 데 공공기관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남는다.

10여일 전 개관한 송파 ‘책박물관’은  ‘책’을 주제로 한 한국 최초의 공립 박물관이다. 도서관, 서점이 아닌 박물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책을 전시하고 활용할지 궁금했다. ‘박물관’이니까 혹시 책이 으레 과거의 기록물로서 박제되지는 않을까. 걱정 반 설렘 반으로 다녀왔다.

6211㎡(약 1815평) 규모의 ‘책박물관’에 들어서자 보고 싶었던 풍경이 펼쳐졌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넓은 홀이 계단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자 편한 자세로 공간을 차지하고 책을 읽고 있었다. 계단식 서가에 꽂힌 1만권의 책은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단순히 책을 읽고 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책과 놀고 즐기고 있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취학 전의 아이들도 1층의 별도 공간에서 뛰어놀 수 있었다. ‘책박물관’의 책을 완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책을 만지고 들추며 책과 거리를 좁히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닳는 만큼 살가워지는 책. 출판이 손에 만져지는 물건을 만드는 제조업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실감됐다.

2층의 상설전시장, 미디어라이브러리, 야외 정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방’이나 ‘출판편집자의 방’ 같은 공간은 책이 쓰이고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해하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책을 만드는 나도 궁금한 속 이야기가 많았다. 무엇을 어떤 필기구로 어떤 종이에 적고 지우며 그 다발을 어떻게 엮는지, 책의 여러 전 단계가 그곳에 있었다. 같은 제조업이어도 출판은 이 점이 다른 것 같다. 사라진 글자, 단어, 문장조차 이야기로 남아 책을 거든다. 이 사정을 알자 책이 한결 생물스러웠다.

책에 몰두한 방문객을 관찰하면서, 책이 개인의 인생에 어떤 이익을 금세 남겨주지는 않아도 책의 메시지와 좋은 문장을 읽은 시간은 헛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의 어떤 고양감이며 자신과 대화하는 느낌들은 마음의 근육으로 남을 것이다.

독학으로 세계적인 건축가가 된, 스스로 새로운 길을 낸 안도 다다오가 떠오른다. 그는 ‘책과 여행’을 통해 자신을 단련했다고 고백했다. 씹어 먹듯이 읽은 책과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었던 여행이 그를 키웠다고. 그의 말마따나 외부의 어떤 힘이 자신에게 들이치는 것보다 스스로 씹고 맛보고 이해하는 주체적인 수용이 오래 남는다. 이 덕목을 키우는 데 책만큼 간단하고 확실한 게 있을까.

작가 프루스트는 말했다. “모든 독자는 자기 자신의 독자다. 책이란, 그것이 없었다면 독자가 결코 자신에게서 경험하지 못했을 무언가를 분별해낼 수 있도록, 작가가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기구일 뿐이다. 따라서 책이 말하는 바를 독자가 자기 자신 속에서 깨달을 때, 그 책은 진실하다고 입증된다.”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을 읽는 것이다. 적어도 책만큼은 마음 놓고 빠져들어도 되는 이유다.

‘책박물관’ 같은 공간이 필요한 이유는 계층을 떠나 누구나 책을 가까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책 안팎의 자료를 열람하면서 책을, 나아가 자신을 읽고 삶의 결을 다듬을 수 있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주체적일 수 있는 권리를 거머쥘 수 있다. 그러니 공공의 책 공간이 늘어야 한다. 복지란 개인에게 수렴할 때 완성되는 게 아닌가. 

책은 가까이에 두면 읽게 된다. 읽고 공유하면 책의 세계는 넓어진다. 이같은 믿음으로 독서문화의 진흥은 시작될 수 있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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