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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마침 시간이 나 선뜻 따라나섰다. 친구가 남쪽에서 하룻밤 묵고 오자는 것이었다. 도시를 벗어나야 춘곤증으로 찌뿌둥한 몸이며 미세먼지로 따가운 두 눈이 개운해질 것 같았다. 연초록이 초록으로 번지느라 숨이 가쁠 남녘의 산과 들이 아른거렸다.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얼마 전 책에서 마주친 문구가 떠올랐다. ‘잘 쓴 시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잘 쓴 시간이라니. 내게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시간이다. 전에 비슷한 시간을 들어본 적은 있다. 이십여 년 전 직장생활을 할 때 존경하는 선배가 있었다. 업무 장악 능력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성격 또한 남달랐다. 말 그대로 ‘칼 같았다’. 자기 기준에 어긋나면 참지 않고 바로 사표를 던졌다. 그러다가 정말 회사를 그만뒀다. 선배가 자발적 백수가 된 뒤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내게 던진 한마디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시간이 참 달다.”

선배가 떠나고 5년 뒤 나도 사표를 냈다. 그리고 4년 가까이 비정규직으로 지냈다. 하지만 선배처럼 ‘시간의 단맛’은 맛보지 못했다. 달기는커녕 시간에서 단내가 났다. 시간에서 신트림이 올라오곤 했다. 시간에서 쓴맛, 신맛, 매운맛, 싱거운 맛을 두루 경험하면서 깨달았다. 시간을 앞서가거나 최소한 동행해야 시간의 단맛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앎과 함의 거리는 아득했으니 나는 여전히 시간의 그림자를 밟고 있었다.

남행길의 목적지는 전남 장흥. 올 초 서울생활을 접고 귀촌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삼십 년 넘게 허겁지겁 시간에 쫓기며 살던 친구가 한달살이를 해보겠다며 짐을 꾸린 것이었다. 내게 한달살이는 여행과 정주(定住) 사이에 존재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보였다. 직선(일상적 시간)과 점선(탈일상적 시간)을 포괄하는 일점쇄선, 즉 중성적 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여행이 관광으로 전락한 이때, 여행이 익숙한 상품으로 소비되는 이때, 한달살이는 새로운 삶을 열어나가는 ‘즐거운 실험’으로 보였다. 

연휴 첫날, 예상은 했지만 고속도로는 수시로 막혔다. 일곱 시간 반 만에 장흥 터미널에 도착했다. 친구가 둥지를 튼 집은 오래된 마을 한가운데, 지은 지 50년이 넘는 농가였다. 내려와서 첫 한 달은 집을 수선하느라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담장을 없애고, 시멘트 마당을 갈아엎고, 도배장판을 새로 하고, 나무를 심고…. 내가 알던 한달살이, 즉 방 한 칸을 얻어 잠시 머무는 방식이 아니었다. 친구는 말끔하게 집을 고친 김에 아예 한 일 년 더 머물겠다고 했다.

늦은 저녁상을 물리고 고샅으로 나섰다. 제비 몇 마리가 낮게 날았다. 얼마 만에 보는 제비인가. 개구리 소리도 자욱했다. 고샅을 벗어나자 바로 논이었다. 물 댄 논. 모내기를 앞둔 저녁 논이 건너편 낮은 산을 비치며 빛났다. 멀리 메타세쿼이아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소쩍새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을 둘러싼 느린 능선이 어두워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선명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땅거미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잘 쓰는 시간, 다디단 시간의 초입이었다.

장흥 친구는 처음 염려한 것과 달리 사나흘 지나자 ‘시골 시간’에 적응했다. 밤 10시면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 해가 뜨면 눈이 떠졌다. 마을 할머니들과도 이내 친해졌다. 틈틈이 둘러보니 귀촌, 귀농한 젊은이들도 제법 있었다. 녹색 가치를 중심으로 지역 운동에 투신하는 주민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장흥은 귀농자뿐 아니라 시민운동가, 문화예술인이 모여드는 ‘핫 플레이스’였다. 강원도, 충청도, 제주도 등지를 거쳐 장흥에 터를 잡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장작불로 데운 온돌방. 눕자마자 꿈 없는 잠에 들 줄 알았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에 관한 우화가 생각났다. 시계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는 대포(오포)를 쏴 시각을 알렸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대포를 관리하는 군인에게 물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대포 쏘는 시간을 어떻게 아시나요?” 군인은 시계방 괘종시계를 보고 안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괘종시계는 어떻게 시간을 맞출까. 시계방 주인에게 물어보니 대포 소리를 듣고 시간을 맞춘다고 말했다. 매 순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도시의 시간’이 혹시 저런 웃지 못할 상황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저런 시간에 맞춘다면 잘 쓰는 시간이란, 단맛 나는 시간이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잘 쓴 시간’은 구글 출신의 기술철학자 트리스탄 해리스가 내놓은 새로운 시간 계량법으로, 필요할 때만 온라인을 이용하고 나머지 시간에 자신의 몸과 감각에 더 주의를 기울이자는 제안이다. 나는 잘 쓴 시간을 조금 다르게 정의하고 싶다. 세 가지 핵심 요소, 즉 지금(시간), 여기(장소), 나(주체)가 일치할 때가 바로 잘 쓰는 시간이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왜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잘 쓴 시간의 주인이다. 아마 그 답에는 성장, 속도, 소유, 접속, 개인보다는 지속, 방향, 존재, 결속, 공동체와 같은 단어가 들어 있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저절로 눈이 떠졌다.알람이 울리기 전이었다. 창호지를 새로 바른 동창으로 햇살이 들이쳤다. 새소리가 들렸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낯설면서도 낯익은 봄날 이른 시간이었다.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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