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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한 권, 소설 한 권, 영화 한 편을 찬찬히 보는 올해의 첫날을 보냈다. 나희덕 시인과 오에 겐자부로 소설가와 후시하라 겐시 감독의 울림을 동시에 얻은 날이 의미 깊었다. 내 인생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클라우드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구름의자에 앉아보십시오./ 당신은 비행기 대신 구름을 타고 여행하게 될 것입니다./ 나일론 섬유로 만들어진 구름은/ 당신을 아주 멀리 데려다줄 것입니다./ 다만, 목적지의 방향과 속력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오로지 바람에 달려 있으니까요./ 우리의 운명을 우리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희덕 시인의 시집 <파일명 서정시>에 수록된 시 ‘미래의 구름’은 “거대한 구름기둥, 저 구름의 제조권은 누가 갖고 있습니까?”로 끝났다. 플루토늄, 세슘 등 방사성물질을 방출하는 구름 밑에, 혼탁한 하늘을 바라보는 날들이 앞으로 늘어날 것이다. 방사선 수치가 떨어졌다고 해도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다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의 구름 밑에서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넷의 가상공간, 클라우드의 세계에서도 나라는 존재는 불확실하다. 가십거리들과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무한 반복되며 증폭되는 세계, 이 가상공간의 제조권은 누가 갖고 있을까. 나희덕 시인의 서정시는 맑은 위로의 세계가 아니라 위험과 재난의 목소리로 삶을 위협하는 것들을 성찰하게 한다. 시집을 덮을 때 “시는 나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다”라는 시인의 고백을 목격하게 된다. 삶을 실감하게 하지만 그래서 두려운 덫.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첫 장편소설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의 개정판은 새해 독서로 적합했다. 개정판으로 새로이 출간된, 오에가 20대 대학생 시절에 쓴 1958년작을 겨울 초에 구입해놓고 들춰보기만 하던 참이었다. 소년 시절 오에가 쓴 시, “빗방울에/ 풍경이 비치고 있다/ 물방울 속에 다른 세계가 있다”를 전해 들었을 때 사물과 세상에 대한 관찰력이 미래의 대작가를 예고하는 느낌이었다. 난해하다는 소문이 도는 오에의 소설들과 사뭇 달리 첫 장편소설은 선명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전염병이 도는 마을에 열다섯 명의 소년이 감금된 상황을 캄캄한 숲 이미지로 묘사했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겪는 소년들의 공포와 불안은 마침내 그들을 억압하던 어른들에게서 탈출하는 장면에서 돌연 힘차고 용기 넘쳤다. “나는 나에게 다시 내달릴 힘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불현듯 바람이 일고, 다가온 마을 사람들의 발소리를 실어왔다. 나는 이를 앙다물고 몸을 일으켜 한층 캄캄한 풀숲을 향해 뛰어들었다.” 소년이 탈출했으리라 믿게 하는 마지막 문장이다. 그가 뛰어든 건 한층 캄캄한 곳이지만 거기에 새 삶의 기대가 있다.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여문다. 차근차근 천천히, 인생은 후르츠”라는 내레이션이 아름다운 운율을 머금은 영화 <인생 후르츠>는 노부부의 슬로라이프에 대한 일본 다큐 영화다. 90세 가까운 건축가 남편 쓰바타 슈이치와 아내 히데코는 일본 아이치현의 고조시 뉴타운에 작은 숲을 꾸미며 살아가고 있다. 숲을 어떻게 꾸리게 되었느냐 하면, 쓰바타가 젊은 시절 참여한 뉴타운 건설 프로젝트가 뜻대로 되지 않자 성냥갑 같은 뉴타운에 활력을 불어넣기로 작정하고 빈 땅에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새 50년 세월이 흘렀다. 젊은 건축가 쓰바타가 설계했던 뉴타운은 자연과 어우러진 집이었으나 경제발전을 우선시하는 당시 사회 분위기는 규모를 강요했다. 상심한 쓰바타 부부는 도시계획과는 거리를 두고 밀어버린 땅을 다시 작은 숲으로 만들자, 녹색 저장소가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모이면 마을이 산 일부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고 실험했다. 노부부는 천천히 땅을 일구고 숲을 즐기며 생활하지만, 이러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 말 그대로 정중동의 삶이다. 조금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는 것이 농사일 아닌가. 채소와 과일, 나무 열매를 얻기 위해 온몸을 바치고 있는 셈이다. 노부부는 고단한 노동 속에서도 스스로 선택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마을과 이웃과 더불어 자연이 주는 선물을 나누는 모습으로 ‘오래 살수록 인생은 아름다워진다’라는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말을 입증했다.

제조자를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래의 삶을 용기 있게 살아가려면 닻이고 돛이고 덫인 무엇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힘을 내며 가야 할 삶의 목적지는 종종 나를 고단하게 붙드는 덫 같다. 닻이자 돛이고 덫인 것, 내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이 새해의 목표다.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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