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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한 해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미투 운동, #불법촬영·편파수사·편파판결 반대 운동, #스쿨미투 운동, #낙태죄 폐지 운동, #탈코르셋 운동 등 새롭고 창의적인 페미니즘 운동이 한국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과 ‘불편한용기’는 각각 여섯 차례 대규모 집회를 개최한 바 있으며, 낙태죄 폐지를 위한 1인 시위가 지속되었습니다.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확장된 탈코르셋 운동은 외신의 주목을 크게 받았고, ‘청소년페미니즘모임’은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 아프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한 해였지만,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들에게 ‘수치스러움’을 돌려주고, 감추었던 경험을 말하고 지지하고 연대하고 싸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몰카, 야동, 리벤지포르노라 불리며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해 온 남성들의 놀이문화에 제 이름을 찾아 주었고 착취성을 폭로했으며, 불법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씨를 품을 밭’이라 여기던 여성의 몸을 주체적 인간의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요청했으며, 타인에게 평가받기 위해 가꾸던 행동들을 ‘꾸밈노동’으로 명명하고 ‘외모로 승부해야 하는 존재’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남성중심의 성차별적 사회에서 불법촬영과 사이버 성폭력, 음란물, 성상품화, 성희롱, 성폭력, 성매매는 이음새조차 없이 매끈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붉은 분노는 강렬한 경고음을 발신하며 땅을 뒤덮고 하늘을 물들였습니다. 세계가 한국의 페미니즘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맞은 지난달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페미니즘을 다시 쓴 인권선언 발표' 기자회견에서 페미니즘으로 쓰는 인권선언 추진단 관계자들이 인권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그럼에도 펜스룰로 시작된 반격은 종래 대학 내 총여학생회 폐지로 이어졌고, 차별의 임계점에서 시작된 저항은 과격한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과잉반응으로 독해되더니, 페미니즘이 젠더갈등, 남녀갈등, 남성혐오만 키웠다는 언론과 정치권의 호들갑과 학계의 오역도 확산되었습니다. 깨어있지 않은 자를 깨우려 한 행동들은 애써 깨어있지 않은 척하는 이들에 의해 왜곡되고 폄훼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남성 혐오론자들의 오프라인 침투설’과 ‘패륜적 여자 일베 집단 처단론’까지 들먹이며 가열 찬 반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갈등 유발론자, 혹은 혐오주의자로 낙인찍혔습니다. ‘지나침’에 대한 경계는 다시 여성들의 입을 막는 명분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실패한 것일까요? 이러한 갈등론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저는 호도되고 있는 역사의 경계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 합니다. 세상의 이면을 이미 봐버린 사람들이 실현시킬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여성들의 분노의 좌표가 특정 개인이 아니라 부정의한 구조 전반임을 깨닫고 변혁에 동참할 20~30대 남성들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억울함의 원인은 여성들이 제공한 게 아니라 기득권이 공고화한 세상임을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문제는 저를 비롯한 기성세대입니다. 남자가 벼슬이던 시절에 태어나 온갖 특혜를 누리던 사람들은 자기성찰을 넘어 기꺼이 특권을 포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생 기생해 살면서 성차별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페미니즘을 비난하던 분들은 그 무지를 더 이상 자랑하지 말아 주세요. 젊은 남성들이 대리전을 치르도록 부추기고 뒤에 숨어 관망하거나 조롱하는 일을 그만두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당신들이 만들고 누려온 누적된 부조리 때문에 다음 세대가 더 이상 멍들지 않게 해 주세요. 세대, 계층,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가 통약불가능한 상수들이 아니라 불평등한 구조를 직조하는 상호 연결된 변수들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분배적 정의와 비분배적 정의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실현되어야 할 긴급한 과제임을 인지해 주세요. 대의명분과 단일대오를 위해 숨죽였던 차이들이, 민주주의의 수사적 도구로만 동원되던 다양성들이 소리치는 아우성에 마음과 귀를 열어 주세요. 일천한 지식과 천박하고 뻔뻔스러운 언행이 아니라, 부디 품위 있되 단호하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모범을 보여 주세요.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 명심할 점은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개개인이 다 정의로운 것도, 정의 그 자체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국의 페미니스트 사라 아메드는, 우리가 반대하는 것이 무엇이며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고, 현재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닿으려는 지향점에서 분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수많은 시작의 순간들을 정성스럽게 모으고, 희망의 지향점들을 하나하나 책임감 있게 쌓아 올려 갈 때, 비로소 ‘우리’는 정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보다 공정·평등한 사회의 가능성을 상상하며 투쟁의 지점에서 만들어지는 정체감과 연대감으로 모두 버티고 성장하고 행복하게 살아남아 주세요. 언젠가 도래할 오늘을 위해.

<이나영 | 중앙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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