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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구석에서 찾아냈다. 고수차. 3년 전인가, 친구가 보내준 중국 발효차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보이차나 철관음, 우롱차는 귀에 익은데 고수차라니. 낯설었다. 운남 지역 고산 지대에서 자생하는 오래된 차나무(古樹)에서 채취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친구가 폐와 기관지에 좋다는 말까지 덧붙였는데도 3년 가까이 손이 가지 않았다.

대만 차 덕분에 고수차를 되찾았다. 지난 연말, 역사학을 전공한 친구가 대만 학술대회에 참석하고 왔다며 차를 한 통 건넸다. 포장이 단아하고 색깔도 보기 좋아 한 잔 우려냈다. 향은 약간 강하고 맛은 순한 편이었다. 내성적인 차였다. 몇 잔 마시다가 문득 고수차가 생각났다. 해발 1500m 이상 고지대에서 500년 넘게 생명력을 유지해온 차나무에서 딴 것이라니 마시는 법이 남다를 것 같았다. 검색을 하다가 놀라운 표현과 마주쳤다. “첫 잔은 차를 깨우는 것입니다.”

중국 발효차는 우리 녹차와 달리 끓는 물에 우려내는데 첫 잔(초탕)은 버린다. 오래 묵은 차일수록 먼지가 많아 씻어내야 한다. 일종의 소독이어서 첫 잔을 우려낼 때마다 개운치 않았다. 그런데 ‘차를 깨우는 것’이라니. 바짝 말라 있는 찻잎은 뜨거운 물을 빨아들이며 천천히 원래 형태를 회복한다. 저 순간을 찻잎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인터넷에서 마주친 저 한 문장이 차와 나 사이의 거리를 무화시켰다. 차가 대뜸 의인화를 이뤄내 내 안으로 들어왔다. 

말이 바뀌면 생각이 바뀐다. 그 역도 성립한다. 생각과 태도가 바뀌면 이야기가 바뀐다. 찻잎에 쌓인 불순물을 제거한다고 하지 않고 찻잎을 깨운다고 하는 마음이 곧 ‘시의 마음’일 것이다. 찾아보면 기왕의 의미를 바꾸거나 키우는 시적 언어가 제법 있다. 그중 하나가 ‘마중물’이다. 마중물은 펌프가 물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할 때 펌프 안으로 집어넣는 소량의 물이다. 지하의 물은 마중물의 도움을 받고 힘차게 지상으로 올라온다. ‘와락’도 있다. 와락은 심리치유 활동과 만나 그 뜻이 번져나갔다. 해고 노동자나 세월호 유가족처럼 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는 분들이 ‘와락치유단’과 만나 다시 일어선 바 있다.

찻잎 깨우기, 마중물, 와락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셋이 하나의 체계를 이룰 수 있다. 다름 아닌 교육체계다. 교육(敎育)은 ‘가르치다’와 ‘기르다’의 합성어다. 영어 education의 라틴어 어원은 educare로 ‘밖으로 끌어낸다’는 의미다. 페다고지(pedagogy)의 뜻도 다르지 않다. ‘어린이를 이끈다’는 말이다. 오래 잠들어 있던 찻잎을 깨우는 일, 지하에 잠겨 있는 물을 마중하는 일, 그리고 마음을 활짝 열고 힘껏 껴안는 일. 이 모두가 교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 가치이자 필수 과정이다.

최근 대학에 불고 있는 새 바람 중 하나를 압축하는 슬로건이 ‘교육에서 학습으로!’이다. 기존의 교육방식이 교수자가 일방적으로 지식과 기술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앞으로는 학생들의 학습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에서 학습으로’의 전환은 서 있는 사람(교수자)과 앉아 있는 사람(학습자)의 역할을 재조정하라고 권고한다. 강의실을 선생과 학생이 ‘함께 서서’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해나가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산실로 바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찻잎 깨우기, 마중물, 와락도 달라져야 한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1 대 다수에서 다수 대 다수로 - 이처럼 교육에서 학습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고 또 다양하다. 가장 큰 이유는 (나이 많은) 교수자의 지식과 경험이 미래세대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당수의 교수자들이 여전히 고전물리학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고 있다. ‘19세기 학교, 20세기 교수, 21세기 학생.’ 최근 대학의 현주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문구다. 대학, 교수, 학생 사이를 가로막는 현격한 시차를 좁히지 않는 한 학생들의 미래는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 어쩌면 이 질문은 곧 폐기될지도 모른다. 학교가 19세기 시스템을 유지하는 한, 교수자가 20세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21세기 학생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다. 갈수록 작아지는 미래 앞에서 청년들은 위축되고 있다. 며칠 전 신년교례회에서 들은 이야기다. 스웨덴의 한 여학생이 수업을 거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고 한다.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미래를 훔쳐가고 있다. 어른들이 돈만 좇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가 사라지고 있다.”

새해 아침, 북유럽 소녀의 뼈아픈 성토를 듣는 순간 10여년 전 내가 한 문학계간지에 기고한 글의 제목이 생각났다. ‘미래를 미래에게 돌려주자.’ 일찍이 북미 원주민들이 말해왔거니와 천지자연은 미래세대에게서 빌려 쓰는 것이다. 우리 기성세대는 ‘개발과 성장 제일주의’라는 중독에 걸려 미래를 너무 많이 훔쳐왔다. 지금 기성세대가 누리는 지나친 풍요와 건강이 다 미래에서 빼앗아온 것이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고, 또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조심스레 찻잎을 깨우고, 마중물을 붓고, 마침내 청년들을 ‘와락’ 껴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가서야 미래세대와 머리를 맞대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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