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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산책자]버려진 길

opinionX 2019. 12. 23. 14:01

도로는 폐쇄되었다. 수십년간 학생들과 장 보러 가는 마을사람과 봇짐 든 할머니를 실어 나르던 도로는 이제 버려졌다. 도로는 여전히 구불구불 길게 뻗어 있으나 닿을 곳이 없다. 어딘가 빠져나갈 곳을 향해 067 미니 마을버스가 급히 도망친다. 백경수를 떠나 금촌까지 가던 마을버스가 어쩌다 나타난 승객 앞에서 먼지를 피우며 멈춘다. 거울처럼 맑아 ‘백경수’라 불리던 그곳도 이제는 맑지 않다. 공장에서 나온 까무잡잡한 노동자 두엇이 발부리를 툭툭 차며 알 수 없는 말을 나눈다.

고기를 얹어주던 길가의 국숫집은 이제 모닝 차에서 내린 젊은 가족을 환영할 수 없다. 뿌연 유리문 안에서 중늙은이 두엇이 막걸리를 붓는다. 길게 늘어선 손님들 앞에서 사철 김을 피워 올리던 찐빵만두집도 공장 밥집으로 바뀌었다. 유리공장, 가구공장, 뭔가에 들어갈 부품 공장.

시속 90㎞로 뚫린 새 도로는 옆의 낡은 길도 드문드문 이어주었다. 그러나 그리로 나가는 차는 없다. 성채 같은 기도원에서 나온 버스와 승용차들은 새 도로만을 주장한다. 산비탈에 앉은 오리구이 식당만이 요란한 간판으로 호객을 하고, 검은 승용차들이 멀리서 방문을 한다. 승용차가 좁은 시멘트 농로를 달리면 경운기 끌던 농부는 아슬아슬한 둑길로 잠시 비켜서야 한다.

그럭저럭 낡은 길로 다니던 마을사람들은 펑펑 뚫린 새 도로에서 쫓겨났다. 차가 없고 먼 곳에 갈 일도 별로 없었던 사람들은 이제 가까운 곳조차 쉽게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발은 묶여버렸고,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는데 그들의 기회는 축소되었다. 마을들은 끊어졌고, 간간이 지나가는 자전거와 농부의 경운기만이 마을을 잇는다.

몰락엔 속도가 있다. 빠른 속도가 일어나면 몰락도 속도를 낸다. 끊어진 도로 옆 마을에서 사람들이 늙어간다. 땅은 원래 면이었으나 선이 됐고, 선은 점이 됐다. 면에는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으나 점들은 다 같다. 그것들엔 이름이 없다. 똑같은 편의점과 똑같은 프라이드치킨과 똑같은 빵집체인이 있는 곳으로 당일 배송 탑차가 바삐 달린다. 얼굴이 똑같은 아이들이 편의점을 지킨다.

새로 뚫린 도로가 이동시간을 단축시켰다지만, 시간의 단축은 늘 거리의 확대를 불러와서 전혀 시간을 단축시킨 적이 없다. 설령 시간이 단축되고 이동이 편리해졌다 해도 우리의 시간은 늘지 않고 노동의 하루만 길어졌다. 이동거리는 확장되었으나 그에 발맞춰 도시가 끝없이 커졌고 우리가 가야 할 곳만 늘었다. 

고속도로가 사방에 건설되고 KTX가 국토를 좁히면서 도시 집중은 오히려 가속화되었다. 그것들은 서울과 부산과 목포를 단숨에 이어주는 듯하지만, 국토를 잇는 혈관의 역할보다는 지방을 서울로 빨아들이는 빨대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그 혈관을 통해 누구나 서울에 가고자 한다. 좋은 학교와 좋은 직장을 다닐 기회는 여전히 서울에 있으니까. 풍족한 삶의 기회는 더욱 쉽게 지역에서 대도시로, 그리고 서울로 옮겨간다.

빠르고 편리해진 교통망은 언제나 이중의 역생산성을 부른다. 마을과 변두리를 비켜선 곳에 곧게 뚫린 새 도로는 머지않아 그 편리를 구가하려는 차들로 붐비고 막힌다. 포화와 정체는 불가피하다. 도로는 단축된 시간을 금세 예전보다 더 못한 상태로 되돌려놓는다. 그것은 마을들을 쇠락시키고 스스로도 신음한다. 사람들의 타고난 이동능력을 빼앗아간 도로가 이제는 스스로도 퇴락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도로를 배신하고 다시 더 넓은 도로를 근처에 뚫는다.

학자들은 이런 사회적 변화를 일컫는 용어들을 이미 여러 가지로 제시해왔다. 변두리 거주지의 유령화, 이동능력의 계급화, 속도의 불평등한 배분…. 두 발과 간단한 탈것으로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었던 이들의 삶은 도로와 속도에 의해 영문도 모르게 변해버렸다. 옆 마을 친구를 만나러 걷던 길은 차가 질주하는 도로로 막혀, 이제는 멀리 돌아가야만 한다. 도로에 의해 삶의 연속성이 끊어진 이들에게 타다와 택시업계 사이의 갈등 같은 것은 먼 나라 이야기다. 대도시 한복판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편의를 찾아 더 나은 소비를 계산하는 삶을 그들은 모른다. 자율주행차, 교통혁명 같은 빛나는 미래의 이야기는 더욱 알 수 없다.

도로에서 밀려난 사람들 중에는 늙은 아버지도 있다. 오랜만에 들른 옛집에 아버지는 없었다. 기울어가는 해그림자가 안방 벽을 길게 드리웠다. 집 앞 개울은 단장하여 돌을 쌓았지만 천변 길에는 아무도 걷지 않는다. 건설차가 먼지를 피우며 지나는 길가로 술 취한 남자가 비척대며 걷는다. 해가 차츰 죽어가고, 가게 앞 백구가 하품을 한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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