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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떨렸다. 한바탕 언성을 높인 직후였다. 떨리는 손가락을 지켜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회의 전에 목소리를 높이지 말자고, 천천히 말하자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데 엎질러진 물이 문제였다. 다시 주워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엎질러진 물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 며칠 나를 괴롭혔다. 베갯머리가 젖는가 싶었는데 내 꿈속까지 축축해졌다. 잠꼬대까지 한 모양이다.

여러 의견을 모아 책을 한 권 내야 했다. 내가 편집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여서 합의를 이끌어내야 했다. 만장일치를 바란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찬성하는 사안은 큰 의미가 없다고 믿는 편이다. 모두가 찬성하는 사안은 대개 변화와 무관한 안이한 사안일 경우가 많다. 나는 한두 가지 쟁점이 분명하게 부각되고 이를 중심으로 논의가 모아져 뭔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쪽이다. 하지만 이번 회의는 엇박자였다. 이전 회의의 반복이었다. 어느 쪽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탁자를 치고 말았다. 

시간을 연장해서라도 매듭을 지었어야 하는데. 양측이 자신의 논지를 좀 더 개진할 수 있도록 했어야 하는데. 사실을 더 확인하고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도록 했어야 하는데.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시라고 부탁했어야 하는데…. 후회하고 반성하고 자책하고 각오하기를 거듭했지만 마음은 쉬 가라앉지 않았다. 낮에는 평상심을 유지하다가도 밤에는 다시 도졌다. 잠을 자다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아내가 ‘요즘 무슨 일이 있느냐’며 물어왔다. 나는 ‘곧 마무리될 일’이라며 길게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내가 엊그제 표지가 노란 얇은 책 한 권을 건넸다. 

수학자이자 신학자인 폴커 케슬러 박사가 지은 <상처 주지 않고 비판하기>였다. 저자는 대학 강단에 서는 한편 기독교 지도자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인성 개발, 리더십 전략, 기업윤리 등을 가르친다. 이 책이 기존의 의사소통(대화법) 관련 책과 다른 점은 구약성서의 잠언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잠언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경전일 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화유산이자 당시 이집트를 비롯한 이웃 민족의 지혜가 담긴 ‘국제적인 지혜문서’다. 케슬러 박사는 시편과 달리 인간의 일상생활 전반을 다룬 잠언에서 현대 의사소통 이론의 핵심을 찾아낸다.

케슬러 박사가 일러주는 대화법의 핵심은 ‘4단계 피드백’이다. 상대방의 언행을 ‘인식’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다. 이때 바로 평가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 능력은 하루아침에 습득되지 않는다. 해석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세 번째 단계가 감정이다. 이 감정은 오로지 ‘나의 감정’으로, 여기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 마지막이 ‘희망행위’. 상대방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이때 선택권은 상대방에게 줘야 한다. 

케슬러 박사의 권유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돌아보니 대화법에 관한 책을 제법 읽어왔다. 가까이로는 마셜 로젠버그의 <비폭력 대화>가 있고 조금 멀리로는 신숙옥의 <화내는 법>, 틱낫한의 <화>가 있다. 이 책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중 하나가 관찰(인식, 사실)과 의견(해석, 요청)을 구분하고 그것을 구체화하라는 것이다. ‘아직도 화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란 부제가 달린 신숙옥의 책은 2005년에 발간됐는데 지금 다시 읽어도 체감온도가 올라간다. 내가 신씨의 책을 꺼내든 이유가 또 있다. ‘녹색평론’ 최근호(169호)에 신씨의 독일 체류기 ‘독일 시민사회, 싸우는 민주주의’가 실린 것이다. 신씨는 일본에서 혐한 문제를 공론화했다가 살인 위협을 받고 2년 전 독일로 일시 이주했다. 

신씨는 도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3세로 평생을 차별과 싸워왔다. 신씨는 <화내는 법>에서 자신의 남다른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한다.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인간성 회복의 첫걸음”이며, 화를 내는 근본 이유는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화를 냈다간 일을 그르친다. 화를 제대로 내기 위해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에 대한 자기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자기 기준은 자존감(자신감)에서 우러나온다. 신씨는 과거 자신이 긍정적 평가를 받은 체험을 되새기면서 자신감을 다져나가라고 제안한다.

맞다. 우리가 분노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자존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분노를 변화를 위한 창조적 에너지로 연결시키는 첫 단추가 ‘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머리와 가슴 사이가 가장 멀다는 경구가 있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과 말 사이의 거리를 떠올린다. 감정과 이성 사이, 말과 행동 사이의 거리도 가깝지 않다. 문제는 반복 학습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모자라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 앎(知)과 함(行) 사이가 멀기 때문이다. 케슬러 박사의 세미나는 4단계 피드백을 5일에 걸쳐 연습한다고 한다. 신숙옥씨도 매일 실험과 학습을 반복한다.  

며칠 밤잠을 설치게 한 편집회의 덕분에 의사소통심리학, 감정사회학과 다시 만났다. 이번에 새로 읽은 책과 다시 읽은 책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수시로 연습해야겠다.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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