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함을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 나오는 이 구절은 흔히 ‘팔복(八福)’이라 하여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씀의 하나다. 윤동주 시인이 팔복의 하나를 모티브로 삼아 쓴 시도 유명하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시인은 다른 팔복은 다 제쳐두고 하나만을 팔복이라며 여덟 번 반복하더니, 갑자기 기대를 배반하듯 그들이 위로는커녕 ‘영원히 슬플 것’이라고 한다. 이 시를 처음 접했던 학생 시절, 마지막 구절에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난다. 바닥조차 없는 시인의 막막한 절망이 어린 마음에도 사무쳤나보다. 사람들은 그래서 이 시를 일종의 풍자시이자 절망시라고 평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떤 평자들은 시인 스스로 슬픔과 절망을 껴안고 영원히 함께 애도하는 ‘행복한 몰락’(김응교 시인)이라 이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슬픔의 자발적인 수용으로 복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되다’는 구절도 그러하다. 사람들은 정작 가난 자체보다는 마음에 주목하여 물질이 아닌 마음의 간절한 태도를 말한다고 받아들이지만, 많은 기독교 실천가들은 가난의 자발적인 선택, 가난을 마음으로부터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라고 설명한다. 실컷 소유를 누려도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는 그런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은수자(隱修者)로 유명한 바실리오 성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너희가 먹지 않는 빵은 굶주린 사람들의 빵이고, 너희 옷장의 입지 않는 옷은 헐벗은 사람들의 옷이다. 너희가 신지 않는 신발은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의 신이고, 너희가 금고에 깊이 넣어 둔 돈은 가난한 사람들의 돈이다. 너희가 행하지 않은 자선은 너희가 범하게 되는 수많은 불의이다.”

성서에서 부자가 천국 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했거니와, 초기 기독교 때만 해도 부는 개인의 행운이 아니라 죄악으로 치부되었다. 어떤 이들이 가난하다면 그것은 누군가 그들의 것을 챙겼거나 부모가 챙긴 것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부와 가난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라고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자본주의 성립과 함께 어느새 가난은 죄악이고 부는 능력 있는 사람의 남다른 성취라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다. 가난은 게으름, 부는 성실이며, 부와 가난은 개인의 근면과 능력 여하에 따라 생겨난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아무도 이렇게 믿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는 가난의 근대화(modernization of poverty)라는 말로 오늘날의 가난을 설명한다. 과거의 가난이 인간의 주어진 한계로 인해 모두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난이었다면, 오늘의 가난은 강요된 가난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연에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자본에 독점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제공하는 상품 외에는 필요를 충족할 방법이 아예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들 상품을 살 수 없는 사람은 가난을 강요당하고 있는 셈이다. 반대로 상품 소비에 포박된 사람들이 빠지게 된 삶의 무능력은 덤이다.

부와 가난이 자연적인 게 아니라 사회적 불공정과 부조리한 경제구조와 제도 때문임을 알아서일까. 우리들은 오히려 나만이라도 이 불공정 게임에서 이기려 안간힘을 쓴다. 가난을 가르쳐야 하는 교회는 성공한 사람을 칭송하고 현세의 부를 구원의 징표로 본다. 목사 자신이 세속적 성공을 과시하고 아들에게 그 부를 고스란히 물려주려는데, 신자들은 그런 목사를 삶의 모범으로 삼아 ‘아멘’을 외친다. 나는 TV에 비친 명성교회 예배 장면에 깜짝 놀랐다. 목사 개인보다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신자들에 더 놀랐다. 수많은 대형교회, 그 교회 건립에 틀림없이 엄청난 돈을 모아야 했을 교회들에서 비슷한 일이 매일처럼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사립유치원의 비리는 우리의 생활반경 안에서 나의 자녀들과 직접 관련된 일이기에 더욱 큰 분노를 자아내는 듯하다. 하지만 유치원 비리에 분개하는 이들과, 내 아이가 입시에 성공하도록 갖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 부모는 같은 사람들이다. 다주택 보유자의 눈곱만 한 세금을 성토하면서도, 나 같은 서민에게까지 세금이 올라서는 절대 안된다고 믿는 이들이 우리들이다. 가난을 잊어버린 사람, 나만 가난하지 않으면 된다는 사람들이 이 불의한 사회를 든든히 떠받치는 버팀목이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