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사적인 기록을 보니 일년에 100편 가까이 영화를 보았다. 100권 넘게 책은 읽었던가, 잠시 헤아려보다가 멈췄다.

출판편집자에게 책을 몇 권 읽었느냐고 물으면 곤란하다. 업무상 참고도서로 들춰보는 그 많은 책을 독서 권수에 포함해야 하는가. 몰입해서 정독한 책만 쳐야 하는가. 에잇, 역시 물어볼 일이 아니다.

슬플 때 읽었던 산문, 적적할 때 빠져들었던 소설, 친구와의 약속이 어긋나 홀로 된 시각에 생각을 가다듬게 한 칼럼, 카페에 비치되어 즐길 수 있었던 요리책 레시피, 언제나 눈 시원한 그림책, 내가 손을 뻗으면 언제나 열렸던 책의 세계는 생활에 편입되어 있었다.

살아 있는 건 모두 매양 같은 느낌으로 만날 수 없듯이 내게 생물체로 느껴지는 책이 생활의 차원이 아닌 예술로 받아들여질 때도 있다. 예사롭게 펼칠 때와는 사뭇 다르다.

가령 영화를 본 후 적극적으로 찾아 읽는 원작과 일부러 챙겨 가만히 마음 다독이며 읽는 시집은 선명한 감각으로 몸에 남는다. 생활로서 독서 활동이 아닌 직업적인 자료 검토도 아닌, 그 자체로 예술적인 아름다움으로 기억된다.

낮에 애니메이션 <목소리의 형태>를 본 날, 저녁에는 이진명 시집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를 찾아 읽었다. <목소리의 형태>를 보고 바로 떠오른 시집이었다. 무려 이십년 넘게 읽어왔다. 이 시집을 처음 읽고 거리를 한없이 걸었던 기억이 묻어 있는 시집. ‘용서’라는 시어가 사무치게 파고들었다.

전학 온 맑고 밝은 청각 장애인 소녀 쇼코를 같은 교실의 소년 쇼야가 앞장서서 왕따시킨다. 따분한 학교 생활에 질려 있던 쇼야는 쇼코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면서 괴롭히지만 쇼코는 늘 생글생글 웃는다. 그럴수록 쇼야의 장난은 더욱 심해진다. 잔인한 일인 줄도 모른다. 가해자이지만 그 문제로 학교 측에서 문제되어 쇼야도 따돌림을 당한다. 가해자가 금세 피해자가 되어버린 상황. 인생의 학교에서도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애니메이션에서는 쇼야의 시선에 걸린 사람들 얼굴에 모두 가위표가 그려 있다) 세상과 차단한 채 살던 쇼야는 6년이 지난 뒤 쇼코를 찾아나선다. 그사이 수화를 배워 제대로 사과하기 위해서 찾아간 것이다. 쇼코는 진심을 전하는 쇼야를 용서한다.

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을 보고 난 저녁에 시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를 감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새는 잠들었구나. 나는 방금 어디에서 놓여난 듯하다. 어디를 갔다온 것일까. 한기까지 더해 이렇게 묶여 있는데, 꿈을 꿨을까. 그 눈동자 맑은 샘물은. 샘물에 엎드려 막 한 모금 떠 마셨을 때, 그 이상한 전언. 용서. 아, 그럼. 내가 그 말을 선명히 기억해 내는 순간 나는 나무기둥에서 천천히 풀려지고 있었다. 새들이 잠에서 깨며 깃을 치기 시작했다. 숲은 새벽빛을 깨닫고 일어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시행이 나뉘지 않은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의 이 한 연은 애니메이션의 강렬한 이미지를 떠오르게 했다. 누가 시적 화자를 나무기둥에 묶었는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시적 화자가 환청처럼 들은 ‘용서’라는 말 때문에 스스로 자유로워진다. 묶인 데서 천천히 풀려난다. 시를 읽으며,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구하는 용서만큼이나 스스로에게 용서를 허용하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위대한 일인가를 생각한다.

<목소리의 형태>의 감독 야마다 나오코는 ‘왕따’와 ‘청각 장애’란 무거운 주제를 왜 이렇게 화사한 색과 맑은 톤으로 연출했는가라는 질문에 답했다.

“이 아이들이 속한 세계에 절망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꽃이 피고 물도 솟고 확실히 생명이 깃든 세계가 있다. 그들을 둘러싼 모든 세계를 고민하는 것이 싫었다”고.

절망적인 세계, 잔인한 심성을 내비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밤을 지나고 있어도 아름다움은 보아야 한다.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는 걸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꽃이든 나무든 강이든 그림이든, 생활 가까이 있는 영화든 책이든. 자신을 나무기둥에 묶은 사람에게 속박당하지 않기 위해서, 새들이 깃을 치는 숲과 새벽빛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용서’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분명히 아름다움은 새벽처럼 존재하는 것이니까.

한 편의 애니메이션과 시집을 보고 읽은 날은 생활의 차원이 달라진다. 내가 무엇에 묶여 있었는지, 왜 묶였는지 묻는 것을 잠시 멈춘다. 나 자신이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그래서 잊지 못할 날이 되었다.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느끼니 더욱 슬프고 이쁜 날이었다.

정은숙 | 마음산책 대표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