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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기록의 힘

opinionX 2019. 2. 18. 15:34

오는 5월2일 500주기를 맞는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메모광이었다. 해부학·식물학·지질학 분야 일러스트레이션에서부터 낙하산·장갑차·잠수함 등의 설계도, 요리법, 금전출납 명세서, 농담과 우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상상과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기록했다. 평생 작성한 ‘다빈치 노트’는 약 1만3000쪽 분량에 이르며, 이 중 7200쪽 정도가 현존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는 72쪽 분량의 작업노트 ‘코덱스 레스터’를 1994년 3080만달러(약 348억원)에 구입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 역시 “조선 최고의 메모광”(정민 한양대 교수)으로 꼽힌다. 다산은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즉시 기록해 보관해두는 ‘수사차록법(隨思箚錄法)’을 썼다. 제자들에게도 ‘동트기 전에 일어나라. 기록하기를 좋아하라’고 당부하곤 했다. 다산이 500여권에 이르는 저작을 남길 수 있었던 데는 방대한 메모가 밑거름이 됐다.

시인 최영미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15일 최영미 시인이 폭로한 고은 시인의 성추행 의혹이 허위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 같은 판단의 배경에는 ‘최영미 일기’가 있었다. 1994년 6월2일 쓰인 최 시인의 일기에는 “광기인가 치기인가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닌 오기인가-고 선생 대(對) 술자리 난장판을 생각하며”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일기를 써온 최 시인은 고 시인 측에서 ‘최영미가 허위 주장을 한다’고 반격하자 보관해온 일기장을 뒤져 25년 전 기록을 찾아냈다고 한다. 재판부는 이 일기를 중요 증거로 인정하고, 최 시인의 미투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앞서 경찰이 조재범 전 쇼트트랙 코치의 성폭력 혐의를 인정해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할 때도 ‘메모’가 결정적 단서가 됐다. 조 전 코치를 고소한 심석희 선수는 훈련일지 등의 자필 메모를 경찰에 제출했는데, 여기에 성범죄와 관련된 정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심 선수 역시 운동을 시작한 초기부터 훈련일지를 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딘 붓이 총명한 머리보다 낫다’(鈍筆勝聰·둔필승총)는 말이 새삼 다가온다. 기록이 기억을 이긴다. 기록이 역사를 만든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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