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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책은 지식을 전달했다. 잘 정제된 역사적 시공간 탐색이나 어떤 특정한 사회현상을 계열화, 이론화하여 보여주었다. 이러한 지식 전달행위는 언어의 힘을 과시하는 일이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중요한 작동원리를 언어화시켜내는 것, 이것이 인문학적 지식행위의 핵심이었다.

그런 일은 오랜 노력과 체계적 연습을 통해 획득될 수 있고 그 노력의 대부분은 관련 지식의 습득과 조립이었다. 자기 안에 책을 쌓아 숲을 이뤄야 했다. 돈을 축적해 부자가 되는 것과는 좀 다른, 지식을 축적함으로써 인간은 지식인이 될 수 있었다. 다양한 앎의 부호들이 아름답게 네트워킹된 정신세계는 한 개인의 큰 자산이었다. 반딧불이들이 사방에서 켜져 어둠을 뚫고 길을 만들어내는, 축적된 지식을 도구로 삼아 어둠을 항해하는 인간의 내면세계는 고독한 오디세이 그 자체였다.

낡은 이야기가 되겠지만 책 혹은 인문학의 아우라가 형성된 지점이 이곳이다. 지식의 축적과 축적된 지식들이 상호 연마되고 마모되어 세련된 형식이 탄생했다.

그리고 그 형식은 즐김과 유희의 대상이었다. 때론 공유와 계몽의 도구였고 말이다. 한 계층이 지식을 독점하던 때도 있었고, 계층 상승열이 지식욕과 맞물려 지식 블록들의 세 대결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사이에 사회는 발전을 거듭했다. 독서는 자기계발의 날카로운 도구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지식 축적의 모델은 유비쿼터스 시대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인간들은 외장하드가 딸린 컴퓨터와 비슷하다. 손만 뻗으면 지식이 있어 쌓아둘 필요가 없다. 오류가능성도 이편이 오히려 낮다.

자신의 축적된 지식체계만을 내세우는 인간은 꼰대가 되어버렸다. 지식의 축적은 이제 전혀 세련된 형식이 아니다. 아는 척이 촌스러운 일이 된 시대에 지식인은 추구할 모델로서의 매력을 상실했다.

이런 시대에 떠오르는 새로운 가치가 있으니 바로 경험이다. 이제 책은 지식을 전달하는 매체로서 존재하는 시간보다, 경험을 제공하는 매체로 존재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 듯하다. 책이 제공하는 경험이란 무엇인가? 극단적으로 말하면 북스테이다. 머물다 가는 공간이다. 사람들은 책을 읽고 지식을 축적하기보단, 그 책에 집약된 특정 시기의 트렌드나 심리코드를 경험함으로써 소비한다. 바로 이 차이다.

그런 책들이 모인 서가는 지식의 창고가 아니라 경험의 전시장이고 추억의 앨범이다. 좀 더 새롭고 진귀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콘텐츠는 조직되고 꾸며진다. 편집과 마케팅도 그런 기조 위에서 전개된다. 다양한 저자와 독자의 만남도 그 경험의 충일감을 높이기 위한 것이고 대중은 이것에 쉽게 빨려든다. 예전엔 축적이 우선인 장르와 경험이 우선인 장르가 나뉘어 있었지만 이제 그 경계는 흐릿해졌다. 나를 만나지 못하면 무식해지리라는 조바심은 책의 표정이 될 수 없게 되었다. 거의 모든 책이 나랑 한번 사귀어보자고 독자를 유혹한다.

지식의 축적과 새로운 이론은 과학 영역에서 이뤄진다. 이론을 만들어낼 때 축적도 의미가 있는 법이다.

인문학도 끊임없이 질문하고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지만 그 나물에 그 밥 아니냐는 매몰찬 시선 속에서 곧 사그라든다. 다만 질문과 문제제기만은 유효하다. 얼마나 기존 정보에서 문제로 잘 모아내는가, 혹은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화시키는가에만 대중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가치연쇄의 재구축은 활발히 진행된다는 뜻이다.

물론 지식의 축적이 그 동력은 아니다. 문제제기와 행동이 전면에 나서고, 무한 전파력을 갖춘 네트워크서비스에서의 동의와 확산이 뒤따른다. 지식은 이러한 곳곳의 게릴라전에 동원되는 용병의 신세다. 세속 도덕의 체계라는 본대를 때리지는 않는다.

거칠지만 이 정도가 요즘 내가 느끼는 지식과 경험의 새로운 방정식이다. 이 틈바구니 속에서 책을 기획하고 펴내는 일은 격렬하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지식의 축적이 옳고 경험의 소비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기획의 유동성이 너무 커졌고 보란 듯이 출판업을 하기엔 기회비용 또한 만만치 않아진 시대에 대한 푸념이다.

경험 제공을 위해 공감 발견력이 중요해졌으니 출판이 서비스업이 돼버렸다는 느낌도 있다. 이것이 불만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위기와 변화는 흥미롭고 흥분되는 일이다. 다만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을 뿐. 아 비선형적이고 공시적인, 어지러운 경험의 시대여, 호모 익스피어런스들이여!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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